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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무거운 짐, 삼독심 카렐 베르네르․지음 박 태 원․옮김 수행의 예비단계 존 디 아이어랜드․지음 박 태 원․옮김 차 례 ․ 세상에 무거운 짐, 삼독심 5 ․ 수행의 예비단계 51 ․ 저자소개 80 *본문의 주는 원주(原註)이며 역주(譯註)일 경우 따로 [역주]라고 표기하였음. 세상에 무거운 짐, 삼독심 The three roots of ill and our daily life Carel Werner Ph. D. Czechoslovakia 카렐 베르네르․지음 박 태 원․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Bodhi Leaves No.24. 1965) 세상에 무거운 짐, 삼독심1) 우리는 지금 엄청난 물질적 성공을 구가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성공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있다. 현대 산업의 생산성 덕분으로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급증하는 세계의 부(富)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며, 실제로 그 부를 소유하고 싶어 한다. 지금 가진 것에 조금도 만족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은 항상 새로운 것을 좇기에 급급하다. 이처럼 들뜬 마음은 한편으로는 끝없이 다양한 물건들을 발명해내면서 또 한편으로는 혹시 그 물건들이 가져다 줄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될까봐 제 몫을 챙기고자 혈안들이 되어 있다. 이렇듯 현대 기술문명의 활력이 한없이 다양해 보이기에, 우리는 이것이 우리 시대만의 특유한 위업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 결과 마치 우리시대가 인류 역사상의 지나간 어떤 시대보다, 과거 어떤 획기적 발전시기보다 윗자리를 점하고 있다는 당치않은 자부심마저 갖는 것 같다. 지금 보는 이 놀랄만한 기술적 발전은 실은 서양의 외향적 발명활동의 산물이며, 그 활동 덕분에 그들은 여타 세계에 비해 물리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통째로 집어삼키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국민들을 오랫동안 강제로 지배했었다. 이제 이 두 대륙의 나라들은 거의 모두 자유롭게 되었고, 각자 그들의 운명을 자기네 소망대로 개척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마저도 기술문명의 마력에 사로잡혀 헤어나질 못하는 듯하다. 더구나 그들은 서양에서 기술적 성과를 도입하면서 일부 이데올로기마저 수입하고 있고, 심지어는 가치성마저 심히 의문스러운 사이비 문화양상까지 수입하느라고 자기네 고유의 정신적 유산은 갈수록 천시하고 있어,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과연 오늘날 우리가, 향락거리로 제공되고 있는 이 다양한 물건들에 매료되는 것이 내용이나 가치면에서 타당한 일일까? 지금 우리가 항상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태도가 이전에 다른 시대나 문화에서 사람들이 취했던 태도와 비교하여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양상인가? 우리의 욕구 이면에는 특별히 더 고상하고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숨어 있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외향적(물질적) 성취의 실제 원인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의 생을 온통 채우고 있는 이 끊일 줄 모르는 물질추구는 그 근저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근저 자체가 바로 갈애(渴愛)이다. 우리가 여섯 감각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끝없이 분투하는 동안 그것은 갖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기실은 갈애 그 단 한 가지의 변용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과장된 억설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시대 문명이 성취한, 일견 놀랄만한 그 모든 장관도 기실은 한낱 즐거운 느낌에 대한 갈망의 결과이며, 이 갈망을 충족시키려는 맹목적 충동이 빚어낸 소산일 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나의 특정한 갈애를 충족시켜 주면 잇달아 새로운 갈애가 생겨난다. 이렇듯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치는 새로운 요구들을 무턱대고 좇아가고 있지만, 가도 가도 언제나 또 새로운 감각이 나타나 충족시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모든 요구들을 주의깊게 분석해 본다면 그 대부분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며, 부자연스럽게 빚어진 것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꼭 충족되어야 하는 불가피한 요구도 더러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과연 누가 기본욕구만 충족시켜 가면서 단지 생존을 유지하는 데 만족하려 들 것인가? 물론 우리는 먹어야 산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 위장을 채우려 드는 야생동물의 본능적 충동 단계는 오래 전에 지났는데도 우리 일상 식생활의 양과 내용물에 대해 합리적인 고찰을 해보는 경우는 아직도 드문 것 같다. 게다가 우리는 동물적 본능의 건전성마저도 상실해 버렸다. 공복을 채울 때 느끼는 만족감을 필요 이상으로 연장하고 또 자주 되풀이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먹는 데서 느끼는 즐거운 미감 자체가 중요하게 되었고,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그 음식의 적합성 여부를 검사하는 애당초 목적과 미감과는 무관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생존에 필요한 정도 이상을 먹게 되었고, 게다가 더 고약한 것은 우리 몸과 마음을 건강하고 싱싱하게 유지하는 데는 전혀 불필요한, 아니 해롭기까지 한 음식물을 먹고 마시고 있는 점이다.(어리석기 짝이 없는 흡연 습관은 말할 것도 없고.) 의복 역시 우리의 기본적 요구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우리는 의복으로 추위와 더위를 견뎌낼 수 있고, 변덕스러운 날씨와 기후에 적응할 수 있다. 또 지역적, 시대적 관습에 따라 조절되기도 해야 하며, 어느 정도까지는 품위 유지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 걷잡을 수 없는 유행의 변덕을 일일이 좇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특히 부녀자들의 패션 유행에서(물론 남성의 경우도 꽤 되겠지만) 매우 두드러지게 갈애가 드러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들 유행병자들은 그래 봐야 기껏 새 유형을 만들어내어 한 몫 단단히 재미보는 유행계의 ‘입법자들’의 제물이 되는 것뿐인 것을. 이렇듯 우리는 인간의 참 요구와 그것이 갈애 때문에 과장되어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들을 계속 관찰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과장하게 되는 원인이 ‘소망-충족’의 되풀이되는 만족감과, 그 만족감과 연관된 즐거운 느낌을 맛보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 다름 아닌 감관적 갈애 즉 형태, 소리, 냄새, 맛, 감촉 그리고 생각의 즐거움을 좇는 갈애인 것이다. 이와 같은 갈애는 결코 충족되는 법이 없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행복을 어떤 특정한 감각대상을 획득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대상을 얻자마자 우리는 그것에 대한 흥미를 상실하고, 다른 대상을 소망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분명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을 획득 또는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잠시 동안만 지속될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거듭 맛보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대상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서 분투 노력해야 한다. 만약 그런 대상이 우리 마음에 감흥을 일으킬 수 없게 되어 버렸을 경우에는 감흥을 줄 만한 새로운 종류의 대상을 찾아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과정이 끝없이 지속된다. 우리가 감관적 갈애의 충동에 기꺼이 순종하는 진짜 이유는,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거기서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행복감을 얻기 때문이 아니다. ‘소망-충족’의 순간에 느끼는 즐거운 느낌을 행복으로 가장하는 것 뿐이다. 실제는 갈애로 야기된 긴장이 순간적으로 완화되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 이같은 긴장은 평소에도 늘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 대개는 자신의 모든 존재 조건이 못마땅하거나, 자기 인생 전반을 나름대로 상정하는 가운데, 그 진로나 가능성에 대해 막연하게 느끼는 불안감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그런 긴장이 미미한 세력이어서 별 것이 아니지만, 어떤 때는 견뎌내기 힘들 정도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소위 정상적인 마음상태를 벗어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보통 이것을 정신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소위 정상적인 마음이란 것도 알고 보면 순간순간 긴장완화를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강박적 충동에 쫓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의 갖가지 활동이란 것도 대부분은 여기에 연원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고문틀에 매달린 죄수마냥 고통 가운데서 살고 있다. 팽팽하게 죄어든 고문틀이 느슨히 풀어지는 동안, 잠시 편안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긴 하지만 이내 고문 같은 긴장을 다시 맛보아야만 한다. 함정에 빠져들게 되는 두 번째 원인 갈애만이 우리가 함정에 빠져 고통받게 되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우리는 즐겁지 않은 일체 사물을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그러다 정 피할 수 없게 되면, 이번엔 이 방해물 때문에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고통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믿어버리면서 이 장애물을 제거하거나 파괴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불유쾌한 것들을 증오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고통의 두 번째 뿌리를 이루는 증오 또는 악의이다. 이 증오도 그 형태가 다양하여 쉽게 분별되는 것이 있고, 잠복해 있어서 분간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현대세계가 구가하는 그 모든 풍요에도 불구하고, 또 지상의 모든 인간의 실제적인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 역량에도 불구하고, 실제 세상은 언제쯤 굶주림이 없어질지, 의류와 주거의 부족이 없어질지, 모든 사람에게 의료혜택이 돌아가게 될지 참으로 만족스런 상태는 요원한 것 같다. 인류의 상당 부분이 필수 불가결한 필요성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한편 나머지 소수는 이들 문제해결의 수단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으로 지나치게 많이 지니고 있는 형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갈애가 초래한 결과이다. 이 갈애는 별 뚜렷한 목적도 없이 무턱대고 끝없는 미래를 향하여 최대 만족을 위한 수단을 확보하려고 애쓴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인위적 빈곤과 불필요한 정신적 고통은 인류를, 국가들을, 사회의 여러 집단들을, 심지어 가족까지도 분열시키는 증오의 근원이 된다. 따라서 모든 계급 분열은 비록 재산 소유의 차이가 엄존하고 있을지라도 결국 인위적이고 불필요한 것임이 명백해진다. 그러나 증오는 외부적 힘은 아니다. 갈애와 마찬가지로 증오는 살아 있는 존재들, 즉 우리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내적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걸 너무 자주 경험해서 탈이다. 가령 남을 희생시켜 가며 어떤 특권을 얻고자 하는 행위 하나하나, 남에게 내뱉는 거친 말씨 하나하나, 다른 생명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생각 하나하나가 다 근본적으로는 증오에 기인하고 있다. 물론 이 증오 역시 노골적일 수도 있고, 완곡할 수도 있으며, 거칠 수도 있고, 섬세할 수도 있다. 또 ‘의로운 분노'니 ‘선의의 비판'이니 하는 명분을 표방하지만 기실은 만족추구나 불만을 회피하는 노력을 정당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인 가려진 증오의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증오라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거니와 불유쾌한 마음상태이고 또 그래서 명분을 표방한 그럴싸한 언어로써 이를 위장하려고 애쓰게 된다는 사실을 모두들 인정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공감은 하고 있는 것 같다. 갈애와 비교해 볼 때 증오는 얼핏 이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즐거움에 대한 감관적 갈애로부터,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갈애와, 불쾌한 또는 방해되는 대상이 없기를 바라는 갈애가 생기는 것인데, 이 후자가 바로 증오인 것이다. 갈애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것으로 보이는 것들에게 집착하게 되며, 증오 때문에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다른 사물을 파괴하려 든다. 그러나 갈애를 경험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苦)를 겪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증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렇다. 또 특정 갈애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새로운 갈애를 초래하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새 갈애는 새 고통을 부르는 것이다. 이 점도 증오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두말할 것도 없이 갈애와 증오, 이 둘이 모두 맹목적인 것이며 무지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근본 원인 무지는 이처럼, 행동․말․생각을 통한 일체의 행위[삼업(三業: 身業 口業 意業)]가 갈애나 증오와 관계될 때 나타나는 모든 고통의 일차적인 원인이다. 무언가 갈망하는 대상을 추구할 때 우리는 그것을 손에 넣거나 가지게 되면 지속적 행복을 당연히 누리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이 곧 드러난다. 그래도 우리는 대상을 바꾸어 가면서까지 다시금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원하는 대상을 획득하는 데 방해되는 얄미운 장애물을 제거해 나가면서 우리는 항구적 행복이라는 목표에 좀 더 접근한 양 생각하지만, 이 역시 그릇된 견해였다는 것이 판명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짓을 되풀이하면서 고작해야 지금껏 써 오던 방식만 바꿀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단순한 육욕의 쾌락에 머무는 대신 예술에서 만족을 구하려 든다든가, 더 나아가서는 예술 대신 철학적 사변에서 만족을 구하려 드는 등, 좀 더 섬세한 대상을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증오도, 적을 살해한다거나 반대자의 앞길을 망가뜨린다든가 등등의 강한 증오의 발로를 누그러뜨려, 다만 그들을 외면하거나 무시해 버리는 방식을 취하는 식으로 상당한 변형을 가져올 수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갈애와 증오 그리고 미망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렇듯 보다 섬세한 형태의 갈애와 증오를 우리는 예의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것들을 적절히 대응해 나가고자 진심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항상 그런 마음이 일어날 때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때때로 이 섬세한 갈애나 증오는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위장을 하고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더 노골적인 형태를 취하고 나타나서, 오히려 외견상 아무 해로움도 없는 것처럼 보이거나 고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실은 이런 경우들이 우리에게는 더 치명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잠재의식 속으로 숨어들기 때문이다. 가령 가장 평가받는 예술작품조차 면밀히 분석해 보면 대개 성(性)과 연관된 경우가 많으며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성에서 영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설령 그 작품들과 성과의 관계가 교묘히 감추어져 있거나 또 작품 속에서 성이 대단히 승화되어 그려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이런 유의 작품들이 우리 마음속 무의식층에 심어 놓은 자극의 씨는 언제든지 적절한 조건만 갖춰지면 즉각 반응을 나타내어, 자극대로 행동하고 싶은 충동을 강화시켜 준다. 그래서, 오늘날 흔해빠진 외설적 영화나 잡지들처럼 보다 드러나게 노골적인 유혹은 무가치하거나 해가 된다고 해서 애써 회피하면서도 좀 더 세련되게 위장한 성적 충동에 대해서는 눈치도 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쉽게 발판을 마련해 주고 만다. 증오 역시 눈에 띄지 않게 변장을 하고 우리 마음속에 숨어 들어온다. 모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열광 같은 것은 애초에는 전혀 무해하게 여겨지며, 오히려 나름대로 이해한 진리에 충실하려는 지각있는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태도들이 급기야 적에 대한 공공연한 증오로, 또 종교적 열광이 반대자에 대한 박해로 발전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설령 어떤 이념이나 철학에 대한 그 같은 열광이 지적(知的) 수준에서 멈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이념이나 철학과 대립하여 그 체계가 정립되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자기 주장의 중요성을 착각한 나머지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공연한 논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면 다른 동료와 분열하게 되는데 이 분열이야말로 증오의 또 하나의 변장한 모습인 것이다. 증오는 보통, 증오인 줄 깨닫지 못하거나 전혀 눈치조차 챌 수 없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증오가 있게 되는 것은, 관련된 사항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뿌리 깊이 박힌 환상 탓인데, 막상 이런 사항들은 중요하지도 않을 뿐더러 실체 또한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지는 지속된다. 출구(出口) 이 미궁에서 벗어날 출구는 있는가? 그리고 참되며 일체의 미망에서 벗어난, 영원히 행복하고 안전한 상태가 실재하는가? 우리 모두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우선 괴로움의 세 뿌리를 극복하고 초월해야 한다. 무릇 쾌락을 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변할 수 없는 자연스런 행동양식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단 여섯 감관과 관계된 일체의 즐거움이 덧없으며[無常], 근본적으로 비참한 것이며[苦], 실체가 없는 것[無我]인 줄을 적어도 이론적으로나마 파악하게 되고 그래서 새로운 출구를 찾게 된 이상, 영원한 행복의 상태를 구하기 위해 질문하는 것 역시, 사물의 자연적 추세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끝도 없고 목적도 없는 우리의 그 모든 고통의 가장 주된 원인이, 바로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참된, 진짜 행복에 관해 무지한 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여섯 감관의 즐거움이 모두 현상세계에 속한 것이며 따라서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그것들에 마주치게 되면 그것들은 실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라지자마자 우리는 그것들의 근본적인 공허성과 환상적 성질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교훈도 끌어낼 줄 모르고, 또 외견상 즐거움으로 보이는 이것들의 참 성질을 찾아 관심을 돌릴 줄도 모르는 것 같다. 기껏해야 언젠가, 행여 바로 내일이라도, 어떤 혁명에 성공하거나 아니면 죽은 뒤 천국에 태어나면 이들 즐거움이 영원히 또 더 완전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남 몰래 간직한, 근거도 없는 희망을 갖고 미래의 새로운 즐거움을 학수고대하는 정도다. 이처럼 어떤 급격한 외부상황의 변화나 또는 어떤 지고한 힘의 역사(役事)에 의해 바깥으로부터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 우리들의 기대야말로 현대인이 지닌 최대의 미망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무지를 한 걸음 한 걸음 소멸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일을 우리는 스스로 남의 도움 없이 해 낼 수 있을까?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스스로 해탈의 지혜를 획득해 낸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또 과거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정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스승이시며 깨달은 분이신 부처님은 비할 데 없이 탁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 긴 세월을 통해 잘 간직되어 온 이 가르침은 우리들이 이해하기에도 매우 용이하여서, 일체의 고통으로부터 해탈로 이끄는 팔정도라는 큰 길 위로 성큼 올라서는 데 필요한 정도의 초보적인 올바른 이해[正見]는 힘들이지 않고도 얻을 수가 있다. 이처럼 깨달으신 분이 베푸신 도움을 활용하기만 하면 무지를 극복하는 첫 걸음을 내디딜 수가 있다. 가르침의 지시에 따라 얻는 올바른 지혜로 한번 훑어만 봐도, 우리는 갈애를 갖가지 변형 가운데서 식별해 낼 수 있게 되고, 갖가지 위장 속에서 증오를 가려낼 수 있게 된다. 또 그럴수록 우리는 참 행복을 얻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도 이것들을 잘 대처해 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점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럼 우리들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할까? 실제적인 첫 걸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결코 소망하는 대상물이 아니며, 또 우리의 긴장, 아픔 그리고 고통의 원인이, 방해하는 물건이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우리의 첫 통찰을 잊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고통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갈애이며, 이 갈애의 극복, 초월만이 우리를 자유에 더욱 접근시켜 행복으로 안내한다. 갈애나 증오가 이길 경우에는 행동․말․생각 면에서 현혹된 짓을 하게 되고 따라서 함정에 더 깊숙이 빠져들게 되어 고통을 연장시키게 된다. 고통의 이 두 가지 뿌리가 치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참 성질에 관한 통찰[觀]을 계속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실제로 모든 고통의 근본 뿌리인 무지에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다. 1. 확인하기 먼저 우리는 갈애와 증오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동 ․말․생각 뒤에 숨은 진짜 동기를 계속 유념, 관찰할 필요가 있다. 보통 우리는 행동하거나 말하거나 생각으로 판단할 때, 정작 그 당시는 우리가 왜 그렇게 하는지 진정한 동기를 모른 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야, 특히 그 행한 바가 못마땅한 결과를 초래했을 경우, 비로소 우리는 갑작스레 치민 분노에 사로잡혀 냉정을 잃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때로는 우리가 어떻게 이러저러한 것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조차 안갈 때도 있다. 그러고는 그것이 ‘우리'보다 더 강했던 탓이라고 말한다. 이때 ‘우리’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우리 자신이라는 어떤 주체를 상정한 말이 되겠는데 정말 그런 것이 있을까. 만일 그런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감정이나 행동 성향대로 움직이려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나 행동 성향과 떨어져 별도로 존재하고 있어야 할 어떤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감정 내지 성향에서 자기 자신을 떼어내는 일은 회고적으로 분석할 때에만이 일어날 수 있는 특수한 사고 작업이다. 다시 말하면 일이 지나간 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와 같이 뒤에 가서 추가적으로 구분짓는 발상은 감정을 소유하는 가상적 주체를 전제로 하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결코 매 순간의 실제 경험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갈애로 말미암아 행동하고 있는 그 순간에는 우리는 다만 갈애 그것이었을 뿐이며, 증오로 말미암아 행동하고 있을 때는 우리가 바로 그 증오였다는 것이 증명된다. 달리 더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오직 갈애만이 존재했고 오직 증오만이 존재했다. 이 두 경우 모두 어리석음과 연관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떤 욕구, 성냄, 미움 등등을 강하게 느끼는 순간, 무엇이 존재하며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 계속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으면 그땐 ‘우리'의 그 욕구, 성냄, 미움은 이미 그것들이 아니며, 바로 관찰하고 있는 알아차림 그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욕구가 갈애의 일종이며, 성냄이 증오의 일종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상태는 이미 전적으로 무지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린다는 것은 이 경우 어느 정도 참 지혜에 해당되며, 따라서 여기에서 현혹된 행동 같은 것은 나올 수 없게 된다. 2. 멈추기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과업을 맞게 된다. 어떤 행위를 하고 싶을 때, 즉 무얼 행하거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을 때, 또는 생각하거나 어떤 결론을 끌어내고 싶을 때 우리는 일단 멈춘 다음, 의도하는 행위의 동기부터 살펴야 한다. 갈망에 찬 또는 증오에 찬 마음상태가 생겨날 때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주시하는 정념(正念)을 지속해 낼 수만 있다면, 그런 태도의 당연한 결과로서 우리는 실제 어떤 행위를 선뜻 행하기 전에 일단 멈추게 될 것이다. 설혹 정념을 지속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참된 동기를 살피기 위해 행동 이전에 일단 멈추어 보려는 진작부터의 의도를 잊어버리지 않는 한, 갈애나 증오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위에 대해, 또는 어떤 사건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행동하거나 말하거나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그렇게 해 버린 행위나 말 또는 판단이, 공정한 관찰자의 눈에 또는 우리 자신이 나중에 차분한 마음으로 되돌아보았을 때 현명하게 비칠 경우가 극히 드문 것이 사실이다. 우리 생애의 많은 문제들은 훨씬 더 유리하게 해결될 수 있고, 많은 가정들이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으며, 수많은 고통도 모면할 수가 있다. 만약 사람들이 스스로 불친절한 행위를 하도록, 거친 말을 뱉도록, 남을 마음속으로 저주하도록 충동질하는, 오직 내면에서 나올 뿐인 압력을 살피기 위해 단 한 순간만이라도 멈추고자 항상 성실하게 노력만 한다면 말이다. 3. 즉석에서의 심사숙고 우리가 행하는 행동의 참된 동기를 사전에 확인하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그 틈을 활용해서 과연 그 일이 수행할 가치가 있는지 여부를 재빨리 반성해 볼 수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세 번째 과업이다. 우리가 고통의 두 뿌리인 갈애와 증오 중, 어느 것이 지금 우리를 이런저런 행동으로 내모는 동기 내지 추진력인지 확인하게 되면 그것을 더 이상 붙들고 씨름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그 행위를 하지 않은 채 그만 두어 버리기가 매우 용이해 진다. 그러나 그처럼 인지(認知)를 해도 여전히 욕구나 반감 또는 증오가 수그러지지 않고 지속될 때는, 모든 숙고 능력과 상상력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같은 현혹된 마음상태가 빚는 행동이 가져올 고약한 사태를 마음에 떠올려보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그 욕구나 증오를 나 자신으로 혼동해 버리지 말고 객관적 대상으로 계속 주시하고 있노라면, 그것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모습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많은 계획을 없었던 일로 돌리고, 많은 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넘기며, 많은 말을 삼가고, 또 많은 해로운 생각의 진행을 중단시키게 될 것이다. 또 특별히 해로운 동기를 발견할 수 없을 경우에도, 현명한 숙고에 의해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의미하거나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고, 역시 단념해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불필요한 일에 더 이상 말려들지 않고 피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가 행하려 하는 행위가 해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더 나아가서 남에게도 이롭다는 것을 숙고에 의해 확인한 연후에 그 일을 행하게 될 것이다. 이 때 빈틈없는 마음챙김을 통해 예민하게 다듬어진 기민한 마음이 단단히 한 몫 하게 될 것이다. 안전한 안내자 물론 내면적 관찰로 얻은 우리 자신의 지혜만으로 만사를 다 판단해 낼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통찰력이 아직 너무 좁거나 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는 비견할 수 없는 스승이며, 올바른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안내해 주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면 된다. 부처님의 경전에는 초심자이건, 향상된 자이건, 또 승려와 재가자 모두를 위한 지침이 담겨져 있다. 또 사원생활을 위한 계율과 속세생활을 위한 행동규범이 모두 율장에 담겨져 있다. 그것을 읽고 익히면 족하다. 그 충고를 단 몇 가지만이라도 현실에 적용해 보면 그 효과를 금방 체험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념의 빈틈없는 주시 태도를 유지, 지속시키는 데 조금만 숙달되어도, 그래서 갈애와 증오의 다양한 모습이 우리의 의식과 제휴하여 빈발하는 양을 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깊숙이 고(苦)의 함정에 빠져들었는지 그 정도를 깨닫게 될 것이다. 증오가 얼마나 치명적 영향을 가져오는지 알게 되면, 더 이상 증오를 묵인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가장 경미한 형태의 싫어함이나 화냄조차도 마다하게 될 것이다. 언제나 완벽하게 증오를 다스릴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증오를 마음에서 몰아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게 될 것이다. 갈애의 한층 섬세한 모양들 그러나 한층 섬세한 형태의 갈애인 경우 당분간은 사정이 달라진다. 모든 욕구를 한꺼번에 다 버릴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욕구에도 비천한 욕구가 있으며, 어떤 조건을 달아 고상한 욕구라 부를 만한 것도 있다. 또 일부 개인적인 욕구는 이내 포기해 버릴 수도 있다하더라도 자기 가족에 관한 것일 경우, 더욱이나 그 구성원의 안녕이 자기에게 달려 있는 한, 일정 수준의 생활을 확보하려는 욕구는 아마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감관적 욕구도 상당한 정도까지는 제어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나 미술에 대한 심미적 즐거움마저 별안간에 다 버리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 마냥 권할 일도 못된다. 예술 역시 감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언젠가 때가 무르익으면 그 역시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보다 ‘세속적'인 즐거움들부터 먼저 버려야 한다. 가령 끽연자나 커피광과 더불어 구경의 진리를 깨치고 어쩌고 운운해 봐야 한낱 고담준론에 그칠 뿐,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깨달음은 먼저 일체의 세간적 취미나 애착부터 포기하는 실천적 노력을 선결문제로 삼으니까. 심미적 즐거움은, 성(性)과 무관한 것이라면, 공부길을 나아가는 우리 노력과 꽤 오랫동안 동반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특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가운데 맛보는 즐거움일 경우, 도움마저 줄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서 다만 즐거움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만이며, 궁극에 가서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만 않으면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심미적 즐거움을 좇아 공연히 헛수고를 하거나 지나친 열광에 빠져 자신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심미적 즐거움에 마음이 아주 강렬하게 쏠리고 있을 경우에 이를 우격다짐으로 누르려고 억지 쓰는 무모한 짓은 않게 될 것이다. 공부가 향상되어 감에 따라서, 그리고 그 향상에서 때때로 맛보는 내면적 행복상태로 인해, 심미적 즐거움에 대한 관심은 점점 약해져서, 마침내는 저절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미적 즐거움은 궁극에 가서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심미적 즐거움은 근본적으로 쓸모가 없으며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지혜로우신 말씀을 새겨 볼수록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즉 적절한 때가 되어 최후의 해탈의 문턱에 서게 되면 부처님의 고귀하신 법마저 집착하지 말고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왜냐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고귀하고 아무리 완벽하며 또 아무리 우리들에게 소중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뗏목과 같은 것이어서 강을 건너는 데 소용될 뿐이지 건너고 나서도 계속 짊어지고 다닐 성질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향상의 최종단계에 이르러 부처님의 가르침마저 옆으로 제쳐두게 되는 일은 정념(正念)의 가장 높고 궁극적인 역할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그 정념의 첫 단계를 서술해 본 데 불과하다. 이렇듯 우리가 지둔(遲鈍)한 상태에 떨어지는 일 없이 불굴의 정진을 계속하면 갈애의 거친 형태들부터 하나하나 떨어져 나갈 것이며, 또 그럴수록 진정한 안도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짊어지고 다니던 짐이 훨씬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일 것이다. 또 증오와 악의에 찬 마음상태도 점차 약해지고 빈도도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모처럼 마음이 평온해지는 귀한 순간에 우리는 해탈한 마음상태의 행복감을 미리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수행의 예비단계 The Preparatory Path John D. Ireland 존 디 아이어랜드 지음 박 태 원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Bodhi Leaves No.37. 1968) 수행의 예비단계 공덕과 선정 수행 불교는 본질적으로 수행도(修行道)이며, 다소 막연한 명칭이지만, 명상이라 불리는 것이 그 중심 수행방법이다. 명상은 대체로 타 종교에서 의식(儀式)이 점하는 지위에 해당되며, 기도가 점하는 지위와는 완전히 부합된다. 사실 불교는 명상, 좀 더 정확하게는 마음 및 마음의 정신적 제 기능(諸 機能)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을 개발하는 일, 즉 봐와나(bhāvanā 수행, 참구)에 최대의 역점을 둔다. (이하 명상이란 용어 대신에 선정 또는 선정수행이란 전통적 불교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역자) 불교의 실천적 면모는 불교 수행길의 체계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불교의 오랜 역사를 통해, 부처님의 실제 가르침에서 시작해서 가르침을 바탕으로 그 후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교학 체계를 통해 불교의 정신적 수행도정은 한 걸음 한 걸음 주의깊게 면밀히 짜여 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 짜임새가 불필요하게 복잡한 것으로 잘못 보이기 쉽다. 우리가 무지한 탓으로 그 긴요성을 잘 못 느낀 나머지 여러 단계들을 빼어버리고 지름길을 찾아나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구체적 실례로, 부처님께서 마련하신 계율을 등한히 여길 뿐 아니라 관용, 참을성, 친절, 남을 돕는 정신 등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덕목마저 배양하려 하지 않는 현상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계율과 덕목들은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를 제거해 주고 또 정신적 향상의 최종 목표를 향해 효과적으로 전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 환경 속에서, 도덕적으로든 다른 어느 모로든 ‘좋은' 일을 실천해 나가면 ‘공덕(puñña)'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이 공덕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동안 많이 남용되어 온 것이 분명하다. 가령 사람들이 선한 행위는 저축되었다가 차후 그에 알맞게 좋은 결과로 보상된다는 식으로, 공덕을 일종의 천상의 저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예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불교의 도덕적 인과율[業] 이론을 잘못 받아들인 사례이며, 공덕의 진정한 의미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밖에 안 된다. 깨달음이라는 목표의 실현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sanā)을 계발하기 위해 특수 선정훈련을 닦는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런 훈련은 조건지어지지 않는 상태, 즉 열반을 실현시키는 조건 중 일부인 것은 확실하나 결코 그 전부는 아니다. 거기에 관련된 요인은 그 밖에도 얼마든지 있으며, 그 모든 조건들이 쌓이고 쌓여서 익었을 때 비로소 열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익음' 또는 ‘정신적 성숙'의 상태 역시 공덕 즉 뿐냐(puñña)가 쌓여져야만 가능하다. 그것도 금생에 쌓은 것만이 아니라, 수많은 전생에 걸쳐 쌓아온 것이라야 된다고 우리는 듣고 있다. 이 얘기는 부처님의 설법에서도 가끔 언급된다. 과거부터 충분히 공덕을 쌓았느냐 못했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 오자마자 바로 깨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니, 그렇지를 못하다고 해야겠지만. 자기 훈련이나 자기 희생 같은 칭찬할 만한 행위의 실천에는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아'의 희박성, 즉 이기성의 부재다. 이것은 모든 불교 수행길의 열쇠다. 불교 수행길의 정상에 다다른 사람들의 주된 특징은 감정적이든 본능적이든 자신을 일절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완전히 깨달았고 따라서 무아의 입장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공덕과 자아희석'을 충분히 이룩한 사람들은 스승이신 부처님께 대한 믿음을 일으키거나, 자기 집착에서 생기는 의심이나 주저함을 없애는 데 있어, 또 자발적으로 전심전력하여 행동하거나 생각하고 그래서 가르쳐 주는 대로 빨리 깨닫는 점에 있어, 별 어려움을 모르고 쉽게 해낸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의 한 특색이기도 하다. 지성을 가려 어둡게 만들며 갈등과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악(惡: pāpa, 칭찬받을 행위와 정반대되는 행위)에서 생기는 탐욕, 증오, 그리고 미망 같은 좋지 못한 감정들이다. 이들이 정신적 향상을 막는 주된 장애물이다. 귀의 불도를 닦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 가운데 ‘귀의'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아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조금 깊이 규명하여 ‘귀의'가 뜻하는 의미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귀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정도이며, 우리가 어떤 다른 것들을 계발해 보아도 결국은 은연중에 이 귀의 과정에 모두 포함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귀의의 대상은 부처님․법․승가 이 셋이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약 2500년 전에 사셨던 고따마(Gotama)가 붓다, 즉 깨달으신 분이었다는 것, 그가 가르치신 교의가 법이라는 것, 그분 주위에 모였던 제자들의 공동체가 승가라고 하는 의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실제로 귀중한 세 귀의처라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못한 면이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가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왜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밝히기 위해 좀 더 깊숙이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물론 고따마 부처님은 지금 우리와 같이 계시지 아니하다. 그러나 부처님이 귀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우리 자신 내면에 깨달음을 실현하는 본성 내지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또, 법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며 귀의 대상으로서의 승가는 아리야2)의 자리에 이른 분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선 이 삼보가 어떻게 귀의처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보자. 귀의처란 위험이나 걱정거리로부터 벗어난 안전한 피난처 내지 보호처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의 이 세 귀의처는 생과 사의 되풀이, 즉 윤회 속에서 방황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다. 귀의처를 찾아 나서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정신적, 물질적 세계의 성격을 파악해야만 한다.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첫째인 고(苦)의 진리만이라도 어느 정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아주 행복하여 인생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 ‘거북함'(dukkha의 문자 그대로의 뜻) 즉 깊숙이 요동치는 불만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물론 귀의처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거북함'을 느끼는 사람의 경우 귀의처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단 한 길, 고에서 해방되기 위해 노력하는 길 뿐이다. 그 해방은 고로부터의 최종적 피난처인 열반에 이름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물론 궁극의 피난처는 열반이라야 되겠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정신적 향상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도(道)와 과(果)의 최종적 실현에 대한 확신과 보장을 얻게 될 때 이 ‘귀의’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 단계를 전문용어로 ‘흐름에 들어선다[豫流 sotāpatti]'라고 부른다. 팔정도 수행은 서서히 삼매-관(三昧-觀 samādhi- vipassanā)의 정확한 수행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여기서 삼매는 고요하고 한결같이 기복이 없는, 균형 잡히고 통합된 마음상태를 의미한다. 그 마음은 전일(全一)한 마음 즉 지적, 정서적, 의지적 등 모든 면에서 최고도로 기능하면서 구경의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한 가지 목표뿐인 통일된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볼 수 있는 태세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또 ‘분명히 보는' 대로 즉 관(觀)하는 대로 아무런 내적 갈등 없이 행동하게 한다. 귀의가 온전하게 되면 삼보가 최고 유일의 안전한 귀의처임을 아는 확실한 지혜와 흔들림 없는 깊은 신심이 생겨나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예류과를 얻기 전에도 사유를 통해서 이런 것을 알 수는 있지만, 이 세상의 환상적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집착과 미망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사유로 얻은 견해로는 그 힘을 감당 못하고 항상 미망에 다시 빠져 헤매어 왔던 것이다. 이제 순수한 이론보다 실제적인 고찰로 되돌아가자. 귀의 절차는 어떻게 밟게 되는가? 출발에 즈음해서 이 귀의가 결코 경솔히 행할 일이 아니며, 어쩌면 인생의 전 행로를 바꾸게 될지도 모르는 중대한 조치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중히 생각한 연후에 정해야 할 사려 깊은 자각적 행위라야 한다. 전통적인 귀의 절차는, 비구스님께 존경심을 품고 나아가 귀의할 것을 요청한다. 보통은 스님께 세 번 청한 다음, 스님이 부르는 대로 귀의문을 세 번 따라 외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금 행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거듭 명심시키기 위해서다. 이렇게 귀의함으로써 오계3) 또는 팔계4)를 받아 지닌 재가신도로서 계율을 준수할 책임을 지게 된다. 귀의문을 되풀이 낭송하는 방식 말고도『중부』에 대한 주석서에 보면 네 가지 귀의 방식5)이 또 있다. 1) 경의(敬意) 표시에 의한 방법으로, 2) 제자신분의 수지(受持)에 의해, 3) 지도이념의 수지로써, 4) 자기 포기를 통하여, 등이 그것이다. 경의 표시는 불․법․승 삼보에 대해 존경과 경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부처님과 그의 대리인(비구승단) 앞에 두 손을 합장하고 엎드려 절하는 것[五體投地]과 공경과 봉헌을 바치는 행위[공양(供養)]6) 등이 포함된다. 또한 법문을 겸손한 태도로 경청하는 것 등이 있다. 제자신분의 수지(受持)는 불․법․승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이들을 자기 스승으로 모시는 것을 뜻한다. 지도 이념의 수지는 불․법․승을 자신의 유일한 참된 안내자, 모범, 귀의처로 섬기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삼보 말고는 어떤 것에도 안내받기를 구하지 않아야 한다. 말하자면 다른 종교에서 도움을 구하지 않으며, 미신이나 행운, 주문 따위에 기대를 걸지 않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기 포기가 있다. 자신의 희망, 야심, 심지어 생명까지 모든 것을 완전히 불․법․승 앞에 내버리는 것이다. 세속적 사물로부터 등을 돌리고 깨달음과 해탈로 이끄는 길을 밟는 일에 자신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귀의에는 또 다른 면모가 있음을 주목해야겠다. 아마 이 때문에 귀의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겠지만, 귀의함으로써 사람들은 인격적 편향성과 결함을 시정하게 되고, 정신적 성숙을 가져오게 되며, 자신감과 대담성을 갖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험난한 길을 나아가기에 더 적합하게 되고 길을 이탈하거나 중도에 포기할 가능성을 줄이게 된다. 이와 같은 신심이랄까, 안전보장이랄까가 기초가 되고 그에 수반하여 지혜가 확실해 지지 않으면 중도에 일탈, 포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겠다. 수행의 예비단계 앞에서는 불법에 대한 믿음의 근본조건으로서, 또 입문하는 데 가장 중요한 예비적 과업으로서 ‘귀의'가 갖는 이론적 및 실질적 면모를 어느 정도 서술했다. 중국 선종의 대가인 대주 혜해(大珠 慧海) 스님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너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에 앞서 반드시 그 사람이 신심(信心)이 진실하여 퇴전함이 없이 그것을 수행할 자질을 갖추었는지 확인해야 한다.……”7) 여기서 ‘그것'은 선종에서 깨침을 얻는 데 필요한 심오한 가르침을 말한다. 이 진실한 신심이란 개념은 불교의 어떤 종파에서나 진리이며 대단히 기본적인 요소이다. 비슷한 생각이 불교의 가장 오래된 경전의 하나인 『숫따 니빠따』에도 나온다. 거기에서 부처님은 브라흐만인 도따까에게 “나는 이 세상에서 의심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도 자유롭게 해 줄 수 없다.(1064 게송)”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신심은 보통 단독으로 있지 않고 몇 가지 다른 요소들과 함께 있는데 이 요소들을 다룬 전통적 ‘명세서’가 불교경전에는 대단히 많이 나온다. 그 중 하나가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五根]인데 여기서 ‘신심’은 첫 머리를 차지한다. 이 체계에서 신심은 ‘지혜’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룬다. 왜냐 하면 지혜가 없이는 신심은 단지 맹목적 신앙이 되고 말 것이며, 신심 없는 지혜는 지적 궤변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의 다른 세 요소 중 ‘정(定)’ 혹은 삼매(三昧)는 깊이를 부여해 주고, ‘정진(精進)’은 활성화시키며, ‘정념(正念)’은 다른 네 요소의 발전을 조정하여 균형을 유지시킨다.8) 이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 말고도 더 일반적인 명세서가 『우다나』9)의「메기야경」(4, Ⅰ)에 나온다. 거기에도 다섯 가지를 들고 있는데 경의 표현대로 하면 “해탈하기에는 미성숙한 마음을 성숙시킨다.”고 되어 있다. 이 말은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정확히 걸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켜 필요한 정신적 성숙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준다는 뜻이다. 우리들이 퇴전하거나 길을 잘못 들지 않고 법을 닦아나갈 수 있게끔 자질을 부여해 주는 것도 바로 이 정신적 성숙이며, 또한 어리석은 범부와 현자를 구분짓는 것도 이 성숙이다. 그 다섯 요소[담마(dhammā)10)]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정신적인 벗[善友 또는 善知識] 2. 계율훈련 3. 수행에 집중된 대화 4. 분발하는 노력 5. 지혜 아마도 좋은 정신적 벗이야말로 수행의 참된 기반일 것이다. 각자가 계발한 모든 선한 자질은 궁극적으로 벗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교훈과 모범의 양쪽을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정신적인 벗으로부터이며, 모든 중생들의 비할 바 없는 벗은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고 그 가르침과 실제 삶을 통해 보여준 지혜와 자비는 또한 바람직한 정신적 벗의 전형을 구현하고 있다. 다시 비근하게는, 우리에게 법과 그 실천방법을 가르쳐 주는 일반 사람인 스승이 바로 우리의 정신적인 벗이다. 우리는 그가 행하는 본보기에 고무되어 발심 귀의하게 되고 계율을 닦게 되며, 또 자신의 정신적 가능성을 열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메기야경」에서 부처님은, 당신께서 제정하신 도덕적 교훈은 정확하게 준수해야 되며, 사소하게라도 이를 어기게 될 경우에 따르는 위험을 잘 살펴야 한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계신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계율의 정신은 그만두고 오로지 글자에만 얽매이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정신과 형식은 겸비되어야 하며, 만일 어느 한쪽이 빠져 버리면 나머지 한쪽으로는 백해무익할 뿐이다. 계율을 적절하게 닦으면 밝은 양심 또는 무회한(無懷恨)11)이 생기는데 이것은 더 앞으로 향상하기 위한 길을 닦는 데 필수적인 단계이다. 자기가 한 일 또는 빠뜨린 일에 대해 회한, 근심 그리고 후회하는 것은 특히 선정수행에 있어서 큰 장애가 된다. 자책감에 방해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려면 엄격한 도덕적 규율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 세 번째로, 정신적 성숙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대화만 할 것을 들고 있다. 이것은 도덕적 규율(계율) 선정수행 등등에 관한 얘기를 가리키며 보잘 것 없는 잡담이나 세속적 화제에 빠져 들지 말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같은 뜻을 가진 친구와 어울리고 정신적 포부에 공명하지 않는 사람은 피하는 수밖에 없다. 끈질긴 노력 없이는, 설사 세속적인 일일망정,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이룩해 낼 수 없다는 점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물며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이라 할 깨달음의 성취에 있어서야 말해 무엇하랴! 지금껏 거론한 모든 것들을 올바로 이루려면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예비적인 단계에서는 보다 높은 지혜의 성취, 즉 실상(實相)을 정면으로 직시할 수 있는 초월적 경지는 고려의 대상에 넣을 필요가 없다. 다만 실제적인 모습들, 즉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능력, 정신적 발전과정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쓸데없고 해로운 것은 거부하는 등등의 평범한 상식에 속하는 측면만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아 자신이 취해야 할 최선의 길을 판단하기 위해서이고, 또 자신의 모든 결함을 올바르게 점검하기 위해서이며, 자신의 궁극 목표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극복되어야만 할 장애들을 분명히 볼 수 있게 하는 견해를 계발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우리는 누구라도 언젠가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들 실수를 통해, 그리고 실수에서 배울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우리 지혜의 기능은 증장된다. 이상의 준비작업이 완료되면, 어느 때인가는 수행이 쉽고 자연스러워지며 장애가 줄어드는 때가 올 것이다. 『상응부』(35상응, 230경)에서 부처님이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듯, 갠지스 강 위를 흐르는 통나무는 아무런 방해만 없으면 결국 넓은 바다에 도착하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정신적 벗의 도움과 우리 자신의 이해력과 지혜의 능숙한 안내를 받는다면 끝내는 열반의 대해(大海)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카렐 베르네르(1926~ ) 체코슬로바키아 태생으로 1968년 영국으로 이주하여 그 다음해부터 덜함대학교에서 인도철학을 강의하였고 현재 런던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고요한 소리〉에서 펴낸 책으로는 보리수잎 10『업에서 헤어나는 길』(The Law of Karma and Mindfulness, BL No.61. BPS)과 보리수잎 41『동․서양의 윤회관』(The doctrine of rebirth in eastern and western thought, BL No.100. BPS)이 있다. 존 디 아이어랜드(1932~1998)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열 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불자가 되어 빠알리어 공부를 하였다. 1960년대부터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하는 연간물에 기고하면서 불법 전파에 일생을 바쳤다. 『상응부 제1권』(Wheel No. 107/109, 1981, BPS),『가려 엮은 숫따 니빠따』(1983, BPS), 『초기 불자 시인 방기싸 장로』(Wheel No. 417/418, 1997, BPS) 등 여러 권의 불서를 영역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저자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감흥어와 여시어경』(1997, BPS)의 합본이라 할 수 있다. 〈고요한 소리〉에서 펴낸 책으로는 보리수잎 47『부처님의 실용적 가르침』(The Buddha's practical teaching, BL. No.25. BPS)이 있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1) [역주] 삼독심(三毒心) : 우리의 선근을 해치는 불선(不善)의 근본(akusala-mūla). 고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세 번뇌. ․탐(貪, lobha): 탐욕, 애착, 갈애, 갈망. 영역은 보통 lust, greed. ․진(瞋, dosa): 진에(瞋恚), 분노, 성냄. 영역은 hatred, anger. ․치(癡, moha): 치암(癡暗), 우둔, 암우, 우치, 어리석음, 미망, 무지. 영역은 delusion. 2) 아리야(Ariya puggala) : 고귀한 사람. 승가에 대한 공식적 서술에는 다음 문장이 들어 있다. “여덟 등급의 (고귀한) 사람들을 포용하는 네 유형의 인물들…”(사쌍팔배)* 이 말은 각기 도(道, magga : 향하는 도중에 있는)와 과(果, phala : 성취해낸)의 단계에서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예류향․예류과․일래향․일래과․불환향․불환과․아라한향․아라한과의 여덟 성취 단계에 있는 성자들) 이 여덟 부류가 고귀한 승가를 구성하며, 범부(凡夫) 승가(puthujjana saṅgha)와는 구별된다. (범부 : 승려나 재가자로 아직 열 가지 족쇄를 하나도 못 푼 채 그 모두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말함) * [역주] 사쌍팔배(四雙八輩) : 경에는 사쌍팔배의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은 공식적 문장을 쓰고 있다. “부처님의 제자 승가는 좋은 길에 들어섰고 … 곧은 길에 들어섰고 … 참된 길에 들어섰고 … 적절한 길에 들어섰다.” 이로 미루어 삼보의 승가는 원래는 법다이 정진하는 수행승을 가리키는 정도의 뜻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사쌍팔배와 범부 승가를 구분하는 사상은 다소 후기에 생긴 경향이 아닌가 싶다. 하긴 부처님의 직접적 지도하에 법다이 수행한다면 예류과에 드는 것은 시간문제이므로 그런 구분이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3) [역주] 오계(五戒): 모든 재가신자들이 지켜야 할 기본계율. ① 어떤 산 생명도 죽이지 않는 것. ② 도적질 하지 않는 것. ③ 비합법적인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 ④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⑤ 취하게 하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 4) [역주] 팔계(八戒): 보름과 초하룻날, 그리고 매달 첫 순과 마지막 순에 많은 재가 신자들이 지키고 있는 계율. ①~⑤는 오계와 같다. ⑥ 점심 이후에는 일체 음식을 먹지 않는 것[午後不食]. ⑦ 가무, 음곡, 화환, 향수, 화장품, 장신구 등을 멀리함. ⑧ 호화로운 잠자리에서 자지 않는 것. 5) 이 네가지는 냐나뽀니까 스님의 『The threefold refuge(삼귀의)』(BPS, 1965)에서 요약하였음. 6) [역주] 공양(供養, pūjā) : 이 말에는 공경(honor, respect)과 봉헌(devotion) 두 뜻이 다 들어감. 7) 존 블로펠드가 영역한 『The Zen Teaching of Hui Hai(혜해의 선 가르침)』(1962) 77~78쪽에서 인용. [역주] 大珠 慧海,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42. 중생자도(衆生自度)품 참조. 8) [역주] 보리수잎 하나 『영원한 올챙이』주해 참조. 9) [역주] 우다나(Udāna) : 남전경의 5부 니까야[經] 중 다섯 번째, 소부경에 들어있는 경. 자설경(自說經) 또는 감흥어(感興語)라 번역함. 10) [역주] 담마(dhamma) : 보리수잎 둘 『마음 길들이기』 주해 참조. 11) [역주] 무회한(無懷恨) : 회한이 없어짐. 청정한 계행을 닦는 데서 오는 곧고 밝은 마음상태로 잘못이나 실수를 뉘우쳐 격렬하게 자책하는 번뇌심이 사라지고 이를 한낱 법으로 냉정히 관하는 마음상태. 이는 무참(無慙) 무괴(無愧)와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무참 무괴는 마땅히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경우에 둔감 또는 마비로 인해 이를 느끼지 않는 마음. 이 두 법은 언제나 해로울 뿐이므로 아비담마 체계에서는 유독 이 두 법을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으로 분류함. 여기서 참(慙)은 스스로 돌아보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고, 괴(愧)는 남에게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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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고요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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