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화면 |
열 넷
물소를 닮는 마음
있는 그대로
아잔 수메도·지음
♧ 차 례 ♧
Patience Ajahn Sumedho (Bodhi Leaves No. B 103) 참을성이란 덕목은 불교인들 세계에선 대단히 찬양되는 것이지만 현대와 같은 물질주의 사회에서는 원하는 것을 즉각즉각 구해오는 능력을 더 중시하지 참을성 같은 것은 별로 대단찮게 치부해버리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온갖 인스턴트 제품이 범람하는 바람에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거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 그 즉시로 그것을 손에 넣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을성이 매우 없어져서 혹시라도 구하는 것을 곧바로 못 구하는
경우가 생기면 단박에 심란해져서 "이놈의 세상 개판이군."라고 투덜대거나 성을
내게끔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찰에서는 참을성을 키우는 일이 변함없이, 여전히 생활의 일부가 되고
있습니다. 태국에서는 특히 동북부에 있는 숲 속 사원에 가면 여러분은 얼마든지
참을성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맛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 생활은 모든 것이
너무나도 불편하기 때문에 참고 견뎌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러분은 온갖 불쾌한 육체적 경험부터 견뎌내야 합니다. 말라리아 열병이라든가
뜨거운 여름철 같은 것을 말이지요. 사실 동북 지방의 여름철은 내 생애 중에 겪어본
중 가장 지겹고 황량한 계절이었습니다. 허구한 나날이 마냥 똑같이 지겹기만 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또 똑같은 날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모든 것이
지루하기만 합니다. "오늘도 무덥구나. 더위와 모기와 땀 범벅의 이 길고도 긴 하루여." 이렇게 온갖 망상 속에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이윽고 여러분은 다시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 나는 참을성을 기르고 있는 중이지. 금생에 참을성만이라도 제대로 기르게 되면 헛되게 사는 것은 아니지. 조금이라도 더 참을성을 기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해. 캘리포니아에는 안 갈테야. 사람들의 넋을 빼는 그따위 집단 감수성 훈련그룹이나 현대식 정신요법, 과학적 실험 따위에 열중하고 있는 그런 곳에 내가 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어. 나는 여기서 이러고 앉아 있겠어. 모기가 팔뚝을 물어뜯는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을 배우며….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이 무덥고 지루한 여름철을 참고 견디어내는 힘을 키우며." 그러고 있으면 다시 이런 생각이 일어납니다. "내 마음은 너무 곤두서있고 예민해.
이렇게 불안정하게 흔들리기만 하고 있어서야 무슨 공부가 되겠어. 왜 이럴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참고 견뎌내는 공부, 다시 말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모든 장애와 망집(妄執), 들뜬 마음 따위를 견뎌내고 그리고 밖으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공부가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곳 치서스트 같은 곳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지요. 여러분들 중에 진정으로 치서스트를 견뎌내고
있는 분은 몇 분이나 될까요.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온통 불평투성이입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못 견디겠다. 이것도 모자라고 저것도 없다. 자유로운 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등 불평소리가 많이 들려옵니다. 또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생활이 없다는
등 바라는 것은 많고 이래저래 마음은 마냥 들레기만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마음속에는 더 좋은 곳, 이보다 더 나은 어떤 곳이 항상 자리잡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로 지금 있는 그대로를 수용해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참을성을 입에 올려 운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동북부의 그 뜨거운
여름철을 내내 앉아 배길만한 결의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일단 깨닫기만 하는 날이면 깨닫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재미있는
최신식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도 만일 깨달을
수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 때는 잔뜩 자존망대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부처님의 지혜는 교만과는 매우 거리가 먼 지혜입니다. 오히려 부처님처럼
지혜로워지려면 엄청난 참을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붓다의 지혜는
유별나거나 매혹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지혜는 핵 물리학자나 정신과 의사 또는
철학자가 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붓다의 지혜는 대단히
겸허한 것인 바, 모든 생기(生起)하는 것들은 반드시 소멸하며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이나 정신에 어떤 조건이
발생하면 그것이 조건지워진 것임을 알며 이 조건 역시 생기한 것이기에 반드시
사라지게 마련이라는 것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解脫]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대로 바로 압니다. 거기엔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기에 공간을 깨달으려면 방안에 있는 어떤 물건도 붙들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방안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열중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평가하기를 멈출 때, 여러분은 그 방의 공간을 비로소 체험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많은 참을성과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자만심으로 차 있는 한 우리는 기껏 불상(佛像)이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또는 후불탱화(後佛幀畵)가 어떻고 벽의 색깔이 어떻다는 둥, 또는 아잔 문 스님의 사진을 보면 신심이 난다, 아잔 차 스님의 사진이 더 그렇다는 둥 별의별 견해가 생겨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 이 공간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할 때… 몸이 쑤시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들뜨거나 졸립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참아내면서 눈 여겨 살피고 귀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입니다. 마음의 불평소리들을,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걱정하는 그 소리들을.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어떤 별나게 재미있거나 매력적인 인물로 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모든 생기(生起)한 것은 사라진다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인식, 가식 없는 인식으로서 그렇게 할 뿐입니다. 붓다의 지혜는 딱히 그뿐, 조건지워진 것은 조건지워진 것으로 그리고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으로 아는 것, 그것뿐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데에 머물고 계시며,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더이상 어떤 것에 대해서든 몰두하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 분들은 더이상 어떤 조건에도 매혹되지 않으시며, 공간 안에 있는, 늘 변하기만 하는 이들 조건들에 마음쓰시기보다는 조건지워지지 않은, 비어 있는 공(空)의 쪽에 마음을 기울이십니다. 자, 이와 같이 여러분이 참선하면서 마음을 비우는 쪽에. 공 쪽에 마음을 쓰게 되면
온갖 조건들[行]에 대한 습관적 갈구, 매료, 반감, 공포, 의심, 불안 등이 줄어듭니다.
이제 그런 것들은 다만 왔다 가버리는 것에 불과하며 자아가 아니며, 흥분하거나
낙담할 대상이 아니며, 그 나름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내가 한 얘기를 깊이 숙고해 보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모든 시간을, 못 견딜 일을 견뎌내는 데에 써 보십시오 아무리 못 견딜 것 같던 일도 참을성으로 대하면 견딜만하게 됩니다. 남들을 그리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참고 견디어 보십시오. 그것에서 굳이 잘못된 면만 찾아내려 들고, 그래서 나 같으면 이렇게 만들고야 말 것인데 하고 고집부리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제 나름으로 갈 길 따라 전개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은 그럴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러한 세상을 참고 수용하는 일뿐입니다. 이렇게 말한다 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거나 좋아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나의 말은 자신의 혼란을 실체로 인정해주어 그렇지 않아도 혼란투성이인 이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라는 뜻, 불평하고 저항하여 마찰과 혼란을 빚지 않고도 얼마든지 평화롭게 그 속에서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
|
아잔 수메도·지음 The Way Things Are Ajahn Sumedho (The Middle Way Nov.1984,
오늘 저녁에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마련인 여러 가지 개인적 갈등과 그
해결방안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먼저 이 `개인' 즉 `나'라는 것부터 생각해
봅시다. 이런 뜻으로 볼 때 명상은 우리들의 뿌리깊은 고정관념 체계를 전혀 다른 방법으로
검토해보려는 의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모든 요소들을 사사로운 편견의
눈으로 보지 않고 공정하게 보겠다는 노력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종교문제이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속하고 있는 이 승려라는 틀도 부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일종의 인습적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제도는 잘 운영하여 이익이 되라고 말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인습이든지 선용될 수도 있고 악용될 수도 있습니다. 일례로 이 물그릇을 들어봅시다. 나는 이 물그릇으로 그대 머리를 때릴 수도 있고 또 그대에게 한 잔의 물을 따라주는 데 쓸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 인습을, 한 물그릇을 좋게 쓰느냐 나쁘게 쓰느냐는 결국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이 물그릇을 놓고 그것이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라거니. 아니면 나쁜 것이라거니 하는 실랑이질만 하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게 들릴 것이겠습니까. 물론 심미적으로 그 그릇을 평가하는 것은 자유겠지만 한 인습으로 볼 때 물그릇은 어디까지나 물을 담는 데 써야 마땅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딴 짓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종교적 인습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종교적 인습은 원래의 용도대로 쓰일 경우 자아라는 환상을 타파하고 궁극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모든 종교들의 원래 목적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인습도 그릇된 목적에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누구의 종교적 인습은 옳고 누구의 것은 그르다는 입씨름일랑 그만두고 궁극의 진리, 초월적 실재를 지향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정의로움이라는 뜻으로 신(神)을 팔면서 행해지는 그 많은 역겨운 짓거리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로 볼 때 인간들은 정의로움 또는 정의로운 신의 이름으로 가장 사악한 짓도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종교 인습 그 자체야 어디까지나 우리를 악에서 구해내려고 만들어진 것이지 어찌 나쁜 의도에 쓰라고 만들어진 것이겠습니까? 종교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 역시 그것을 어떻게 쓰는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인생은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제치고자 마음먹고 있느냐, 그래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 관례와 인습들 속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나가길 배우고자 하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육신을 쓰고 있다는 이 자체부터가 하나의 인습적인 실재입니다. 이런 것부터가 바로 우리의 한계성이며, 우리가 그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관례적 형식이란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현명한 시인(是認)이 될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인정하고 들 때 우리는 그 한계성 속에서 어떻게 잘 살므로써 최소한으로 자신의 생을 보람있게 만들어 어리석고 쓸모 없는 삶이 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 그리고 나아가서 이 한계성을 어떻게 세상에 대한 자비행의 터전으로 활용할 수 있을는지를 강구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깊이 숙고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일생을 바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얘기해보라면 나는 당장이라도 수많은 항목을 한참동안 열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량한 남녀가 일생을 바쳐 해야 될 일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여러분들도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 남자가 또는 한 여자가, 또는 수상이, 왕이, 여왕이 또는 어떤 사람이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 머리는 꽉 차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이상(理想)은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실의 모습, 인간 조건의 실상입니다. 이 현실을 우리는 이상 못지 않게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남자 또는 완전한 여자라는 이상이 한 측면을 이룬다면 이 육신을 쓰고 살아야만 한다는 시실, 그것도 온갖 변화를 다 치루어내야하고 건강과 활력조차도 일정수준으로 지탱해내지 못하는 육신을 쓰고 살아야 하는 엄연한 조건은 또 다른 측면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늙어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활력은 쇠퇴해가기만 합니다. 감관을 통해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능력도 약해져 갑니다. 기억력도 희미해집니다. 이윽고 육신이 활동을 멈추면 죽음이 뒤를 잇습니다. 생각하면 우울한 일입니다. 생의 그런 면을 우리는 결코 좋아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참으로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평생 내내 젊고 멋지고 활기차고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팔십이 되든 구십이 되든 아니 백 살까지라도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죽은 것을 거부하려들기까지 합니다.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이지요!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 몸으로 영원하게 산다? 설사 그것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일지라도 나는 그것이 엄청나게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세대 또 한 세대 계속해서 죽어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은 그 가운데 앉아 백 년이고 천 년이고 태극권을 연마하거나 꽃꽂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나는 우리가 유한한 기간 동안만 산다는 사실이 하나도 의기소침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나는 그런 사실을 즐겁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숙고해보곤 합니다. 죽어가는 과정을 무슨 불쾌하고 무섭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오히려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라 봅니다. 나 개인의 심정을 말한다면 죽음이 꽤나 기다려지는 편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아주 멋있는 일일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생을 혐오하거나 삶에 실망해서가 아닙니다. 나이 들면 자연히 죽음을 준비하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일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육신의 노쇠과정에 대해 숙고해보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나이들어감에
따라 비로소 정작 주목하고 관찰하고 파악해야 할 가치가 진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기 시작하고 있는 셈인 것입니다. 영국 로케이트에서의 수련대회에서 마지막 열흘간의 참선과정을 지도해본 적이 있는데 그 때 80대 할머니들이 세 분 동참했었습니다. 내가 보니 그들은 들뜨는 일이 전연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편안하게 잘 앉아 버티었으며 그저 어쩌다 몸을 조금 흔드는 정도였습니다. 젊은 층들이 겪는 그 엄청난 들뜬 기운을 그들은 전연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젊은이들은 내내 몸을 움직이고 뒤척였는데 정말 그들은 가만히 앉아있는 데만도 온 의지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전신에 기운과 활력이 넘치니 아니 그럴 수가 없는 노릇이지요. 이제 우리는 늙어가는 과정이란 것이 우리더러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도록
만들어주는 정신 훈련의 한 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결코 인간으로서의
몰락과정도 두려운 그 무엇도 아니며 오히려 사물의 존재방식을 깨닫도록 해주어
죽음의 순간에 대처하도록 도와주는 것인 줄로 올바로 알아차리기 시작한 셈입니다. 사물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그 생멸의 과정에 대해서 깊이 숙고할 수 있게 되면, 여러분은 격렬한 육체적 고통, 가령 중풍이나 관절염을 앓을 때엔 그 고통을 참선공부의 주제로 삼을 수가 있게 되며, 참을성을 기르는 공부에, 제약 속에서 견뎌내는 공부에 이용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 땐 이미 이전처럼 "이 병 때문에 나는 망했다. 모든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라는 식으로 생각하지를 않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생기든, 어떤 제약 속에 갇히게 되든, 그 상황을 현명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더이상 추구하지 않고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의 삶으로부터 배우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인간 조건을 이루는 인습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전통적 관례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주시하고 숙고할 수 있는 마음이 성숙했다는 증거라 해도 좋겠습니다. 이제 그런 마음으로 살펴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바야흐로 인습적 관례가 크게 무너져가고 있는 사회입니다. 어찌 보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며, 이제는 분명한 관례라곤 하나도 남아있지를 않습니다. 이전에는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이, 요직에 부합되는 지도자들의 자질이, 귀족적인 품의 같은 것이, 모두 분명하게 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관례는 분명하고 확고부동했으며, 우리는 그런 위계적 구조 속에서 각자 자기 위치를 지키고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구조가 내팽개쳐져 버렸고 평등, 자유, 행복추구, 개인주의 등의 이상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혼란한 상태, 혼란한 사회에 우리는 처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분명하게 규정된 것이라곤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서 아무도 남하고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는지 똑바로 알고 있지를 못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많은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은 자유를, 즉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파 뒤집고, 별의별 실험을 다 해볼 수 있는 자유를 너무 많이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에는 이익과 불이익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민주주의에서는 매사가 이롭기만 하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도 불이익은 역시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매우 조직화되고 구조화된 사회, 모든 사람이 윗사람, 아랫사람에게 대해 자신의 위치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사회에도 이익과 불이익은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이상으로서의 자유만을 생각하고 있어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방해하는 것은 일절 존재하지 않는 그런 자유를 그리고 있습니다. 참 멋진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윗사람, 아랫사람, 동등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책임감을 지니고 한 구조 속에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횡포요, 억압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숙고하면서 살펴보기 시작하면 모든 인습적 관례에는, 그것이 정치적인 것이든,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인 것이든 거기엔 이로운 점과 불리한 점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완전한 것은 찾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어떤 인습에서도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그대로의, 이로운 것뿐이고 불이익은 하나도 없는 그런 완전한 자유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지혜는 바로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구체적인 인습들을 때와 장소에 알맞게 이용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는 편이 완전한 것만 끝없이 찾다가 결국 전적으로 이롭기만 한 것은 도대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게 되는 편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물에 대해서 활짝 열어야 합니다. 더이상 어떤 고착된 편견의 입장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한 가지 입장만 택하여 거기에 집착하면, 그것을 위협할 것으로 보여지는 그 모든 여타의 것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여기에, 놓아버리고 관찰하는 길이, 마음을 시간에 대해 공간에 대해 여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길은 정신차려 지켜보는 마음가짐을 요구하며, 우리가 취하는 모든 언행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반드시 최선, 최상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벗어나 시행착오를 통해서라도 배워나가려는 의지를 요구합니다. 어쨌건 우리의 마음만 열리면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일에서 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며, 실수를 범하게 되면 그 실수를 받아들여 교훈을 삼을 수 있도록 마음가짐이 되어있어야 겠습니다. "젠장, 내가 정말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실수가 있을 수 있어. 이것만 봐도 나는 틀렸어. 무얼 하건 또 실수만 저지를 게 뻔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나는 항상 정념(正念)을 유지하고 있어. 나에게 실수란 있을 수 없어."라는 식으로 자기 행위를 무조건 합리화시키려들거나 해서는 곤란합니다. 누가 곁에 있다가 "흥, 당신이 실수하는 걸 이 눈으로 똑똑히 봤는걸."라고 하면 당신은 "천만에, 그건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한 거야. 그건 신중한 생각에서 나온 현명하고도 교묘한 조치였다구."라고 둘러대려 듭니다. 우리는 자기가 지닌 결점이나 자기가 행한 짓거리를 "너의 지혜를 시험해보려 일부러 그래 본 것이야."라는 한 마디로 모두 정당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양심적이지 못한 스승일수록 그런 짓을 곧잘 합니다. 상좌부 승려 노릇에도 이로운 점과 불리한 점은 다 있습니다. 우리 스님들이 하는 얘기를 듣다보면 자칫 승려 노릇엔 온통 이로운 점뿐인 것으로 생각이 들 때가 있겠지만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불리한 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불리한 점이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측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인습이 지닌 이로운 점과 불리한 점 그 모두로부터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성(性)에 관해서도, 지금 문제되고 있는 것은 이상적인 평등을 실현하는 것으로 남녀에게 똑같은 권익을 보장하여 일체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주안점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고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이상으로써 이를 실현하려면 높은 지혜가 필요하며, 특히 그 지혜는 남성적인 지혜도 여성적인 지혜도 아닌, 성을 초월한 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인습의 차원에서는 아직도 차별이 끝없이 많이 있습니다. 여성 편에서 보면 남성 쪽이 훨씬 이로움을 많이 누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남성이 되든 여성이 되든 이로운 점과 불리한 점은 있습니다. 남자가 된 데에도 분명히 많은 불리한 점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이 문제에 있어서도 쌍방의 장단점을 이해하도록 노력할 일이지 어느 한쪽 성이 되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는 식의 생각은 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아(에고)의 문제로 넘어가면 문제는 딱 하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문제는 어쩌면
한결같이 불만족스러운 것뿐이냐는 것입니다. "나의 부모님은 왜 깨달은 분이
되어주지 못하셨을까. 그러고 보니, 이 나라의 대통령이란 존재들도 도대체가
문제로군. 미국의 역대 대통령치고 아라한이 어디 한 사람이나 있었나. 아라한은커녕
불교도도 아니지 않은가. 나를 가르쳤던 학교 선생님들도 이제 생각해보니 모두
일종의 노이로제 환자들이었어."라는 식으로 매사가 못마땅하고,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럼 이제 그 모든 것이 반대로, 마땅한 쪽으로만 이루어졌다고 쳐봅시다. 이처럼 조금만 깊이 숙고해보면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념들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는 가장 큰 불리한 점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큰 지혜를 얻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장님이나 귀머거리 또는 소아마비로 태어난 사람들은 평소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탓인지 때로는 우리 기준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나게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무서운 힘과 지혜를 짜냅니다. 이에 반해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인 이점, 신체적 건강, 미모, 지위 등등을 고루 빠짐없이 갖추었는데도 이렇다 할 업적을 전연 못 이루고 마는 수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이 너무 손쉬운 탓인지 생활에서 박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자기 만족에 빠졌거나 방일해져 버린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가 지니고 있는 인습적 자질을 깊이 관(觀)해 봄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재고 평가하거나, 심지어 자기가 제일 좋은 점을, 제일 잘 갖추고 있지 못하다 해서 풀이 죽거나 하질 않고 자기가 지닌 성품이나 능력, 또는 능력 부족을 있는 그대로 어떻게 써야 할는지 강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개체로서 우리가 지닌 한계선 내에서 어떻게 현명하고도 원숙하게 처신할 것인지 강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서양의 불교 신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남들 눈에 띄지 않게끔 몸을 숨기고 지내는 밀실(密室)의 불자(佛子)쯤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요? 남들이 우리를 경멸하고 어딘가 좀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까봐 불교도란 사실을 감추고 싶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름 수련대회 때에나 슬쩍 나타났다가 다시 일 년 내내 숨어 지낼 장소를 찾아 스코틀랜드의 고지대 같은 곳이나 찾아드는 식의, 일종의 숨은 생활을 영위하려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시절인연상 그것이 가장 적절하고 다른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우리 사회를 위해 크게 도움될 생활 방식을 실천하고 있는 한 선각자로서 자신을 돌아볼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즉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떳떳하게 책임을 지는 것은 우리의 수행을 위해서도 매우 유익한 일인 것입니다. "흥, 여기가 불교 나라였다면 난 정말 뭔가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현실이 이 모양이니 눈에 띄는 것이라곤 모조리 흠투성이요 불리한 점뿐이란 말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가망없는 나라로 보고 완전히 기가 꺽여 물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딘가를 이상향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맞았어, 태국은 내가 뭘 좀 해볼 수 있는 나라일 것 같애. 틀림없어!" 실제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곳의 불리한 여건이나 흠들을 모두 들추어내고 다른 곳은 그런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상상합니다. 사람들은 논에서 일하는 태국 농부의 행복스러운 모습을 낭만적으로 머릿속에 그려보곤 합니다. 그 농부는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박사 학위가 주는 따위와 같은 부담은 아예 지니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영국인 기질을 부담스러워해야 할 필요도 없고 영국의 추위가 주는 어려움도 없고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 으레 안아야 하는 갖가지 문제점들도 없을 테지요. 그 농부에게는 이렇듯 온통 밝은 면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마냥 웃음이 넘치고 지혜 또한 충만한, 때묻지 않은 먼 이방인을 머릿속에 그리며 동경합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가 직접 살아보게 되면 태국 동북부에 태어난 사람들이 맛보던 온갖 불리한 점들을 맛보게 됩니다. 전에 상상했던 그 행복한 태국인, 얼굴엔 웃음만이 있고 가까이에는 절이 세워져 있고, 골치 아픈 문제라곤 전혀 없는 그 행복한 태국인은 하나의 낭만적 환상이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불교가 태국의 모든 문젯거리들을 다 해결해버렸고 그러니까 영국을 위해서도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릅니다. 나로 말하자면 태국에서의 생활을 즐겼고 그 나라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가 살고 싶습니다.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조금도 거역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곳은 지구상의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도 역시 불리한 점은 있습니다. 분명히 좋은 점도 있지만 완벽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미국인인 여러분들은 계급구조가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사회에서 자라났습니다. 그것은 미국이 혁명적인 이상주의, 즉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이념이 만들어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에도 계급구조가 다소는 있지만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공연하게 인정되고 있지도 않습니다. 사실은 계급구조를 무시하고 부인하는 것이 국민된 의무이기도 하는 바, 이것은 "누구에게나 동등한 권리를!"이라는 만인 평등 사상이 그 나라의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상이 한창 성장기의 마음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깊을 수밖에 없으므로 미국 사람들의 일반적 사고방식 "우리는 모두가 똑같다. 그런데 너는 왜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시키려드느냐"는 식이 됩니다. 가령 당신이 어느 기업체의 전무 이사로서 자신을 윌리엄 존스라고 소개한다면, 신입사원은 "자, 빌, 당신을 위해 여기서 일하게 되어 기쁩니다."라는 식으로 인사를 차릴 테지요. 그런데 혹시라도 너무 정중하게 "존스 씨, 당신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쁩니다."라고 했다면 당신은 속으로 "바보 같으니"하고 혀를 찰 것이 뻔합니다. 전무는 전무로서 손색없이 자기 역량만 발휘하면 그만이지, 전무나 평사원이나 다를 게 무엇이냐는 사고방식인 게지요. 그렇지만 실제로 전무 이사란 얼마나 감당하기 벅찬 대단한 자리입니까. 어쨌든 미국의 이런 상황은 여러 가지 이로운 점과 또한 여러 가지 불리한 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인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타인들에 대해 처신해야 할 것인지 자신감을 못 가집니다. 미국인의 인간관계가 주로 친구로 어울려 친밀하게 구는 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똑같고 평등하다는 생각만이 너무 굳게 다져져서 어떤 구체적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상황이 요구하는 적절한 몸가짐을 자신있게 취하지 못하고 맙니다. 특히 남의 아랫사람 노릇에 그러합니다. 사실 남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고 복종하고 돕고 공손하게 굴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특히 미국인인 여러분은 어쩌다 누구를 섬겨야만 하거나 누군가의 밑에서 지내야 할 입장이 되면 마음속으로 심한 증오심을 끓이게 됩니다. 사무실에서 일손을 거드는 급사조차도 커피 한 잔만 끓여달라고 하면 속으로 곧장 "흥, 내가 당신 노예인 줄 알아?"라고 투덜댑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어디까지나 급사이지 너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누구를 대하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자신있게 확신을 못 갖는 이런 일반적 혼란이 미국인들에겐 때때로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미국인들은 종종 영국인들을 곤경에 빠뜨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급하게 너무 친밀해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단박에 모두를 친구로 만들려 들기 때문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과 금방 친구가 되는 그런 성향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국인의 이런 태도를 무례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미국식으로 사람들이 친밀하게 굴고 사귀기가 쉬워 만나자마자 거의 죽마고우처럼 되는 데에도 분명 좋은 점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계급구조의 사회에서는 인간 상호관계의 모든 면이 분명하게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는 결국 그 모든 관계가 조만간에 경직되게 마련이며 사람들은 별 수 없이 소심해져서 자신의 특정 위치에서 벗어나려 들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계급구조 사회 내에서는 사람들은 설정된 한계 밖으로 나가거나 남과 너무 친밀해지거나 또 위나 아랫사람으로부터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도 또한 이로운 점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와 같은 지적을 하는 것은 나 자신이 평등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살아왔고 또 태국 사회와 같은 심한 위계적 사회구조 속에서도 살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원(寺院)제도 역시 매우 계급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양쪽 제도의 장단점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은 숙고해서 잘 살펴 볼 일이지, 함부로 어느 쪽을 편들거나 반대할 일은 못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제치고 한 가지 처리방식에만 국집하지 않게 되면 양쪽 모두 시의적절하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한 가지 고정된 당위론적 견해로 모든 상황을 풀려들지 않고 국면의 변화에 따라서 자신감을 가지고 자유로이 적응해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비판받거나 거부당하기를 싫어합니다. 안 그래요? 그렇지만 때로 온 마음을 기울여 남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역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서 큰 기쁨을 얻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그것이 비천한 노예근성이거나 나약함 또는 열등감을 자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누구나 남을 돕고, 남에게 봉사할 수 있으면 기쁨을 실제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런 일은 품위를 손상시키거나 격을 떨어뜨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속에 "난 너의 노예가 아니다. 어찌 감히 나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있는가? 네가 해라! 너도 사지가 멀쩡하지 않느냐!"라는 식으로 거부하는 생각을 품고 있을 땐 그것이 품위와 격을 떨어뜨리는 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일 뿐입니다. 승려로서 우리는 절 집안에서 윗사람을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대중을 이끌어나가고 또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를 배웁니다. 그것은 정해져 있는 위치는 아닙니다. 각자의
위치는 시간과 장소에 다라 달라집니다. 때로 여러분들은 남을 주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이것저것 할 일을 지시하는 역할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태국 치서스트에 오는 아나가리까(재가 수행자) 중에는 과거에 중요한 직위에서 일해
본 경력을 지닌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절에 오면 그들도 입산 서열대로
모든 `아나가리까'나 비구들의 맨 끝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그럴 경우 자기보다
어리석고 자격도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을 시봉해야 하는데서 좌절감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라면, 또 하나의 극단은 여러분이 상급자가 됐을 때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그대가 그다지 주도적이지 못하고 수줍은 성격의 사람이라
칩시다. 자신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판인데 남을 지도해야 되는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어느덧 구참 스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대는 생각합니다.
"맙소사, 사람들은 내가 완벽하기를 바라는군. 저들은 어떤 문제든 모두 답해주기를
바라는군. 지도를 해주어야 되는데 어떻게 내가 그럴 수가 있어." 그래서 그 입장에서
벗어나 보려 궁리합니다. "아직 나는 그럴 준비가 안돼 있어. 어디 가서 토굴생활이나
할까, 아니면 태국으로 돌아가 버릴까?" 그러나 이런 상황을 곰곰이 잘 들여다보면
이번에는 이것이 바로 당신이 공부해야 할 과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때는 섬기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하고, 또 어떤 때는 앞장서 이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양쪽을 다 해낼 수 있도록, 변화에 적응하도록, 시간과 장소에 따라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알도록, 그리고 구조 내에서 그 집단의 안녕을 위해 일하는
법을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은 고정된 관념보다는 현명한 고찰을
필요로 합니다. 이와 같이 자유로이 적응하고 현존상황을, 우리 실생활을, 도(道)로
살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공부해나가면 자연히 팔정도 수행으로
발전해나가게 됩니다.
The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보리수 잎·열넷 1989년 10월 12일 1판1쇄 발행 지은이 : 아잔 수메도 값 500 원 ISBN 89-85186-20-5 02220 |
(사) 고요한 소리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72 번지. 전화: 739-6328, 725-3408, 전송: 723-9804
부산 지부: 051) 513-6650, 대구 지부: 053) 425-4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