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화면 |
스물 여덟
나라다 스님/냐나띨로까 스님 지음
An Outline of Buddhism 나라다 스님 지음/ 김한상 옮김 NARADA THERA
왕자는 열여섯 되던 해 아내를 맞았고 아들 라훌라를 두었다. 스물아홉이 되기까지 그는 아내와 더불어 행복하고 호사스러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생각이 깊고 자비로웠던 싯닷타 왕자는 세속적 쾌락만을 안겨주는 덧없는 왕궁 생활을 즐기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랐으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꼈다. 안락하고 유복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는 세상 어디에나 고통이 있게 마련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장래에 부처님이 될 분에겐 온갖 세속적 유혹들이 있는 왕궁은 더이상 머무를 곳이 못 되었다. 즉 그분이 출가할 때가 무르익었던 것이다. 범부들이 그토록 구해마지 않는 감각적 쾌락이 얼마나 무익한 지를 깨닫고, 현자들이 환희심을 구해 떠나는 출리(出離)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깊이 인식하자, 왕자는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온갖 세속의 쾌락을 등지고 사문(沙門)의 황색 가사 하나만을 두른 채 진리와 평화를 찾아 홀홀히 방랑의 길에 나섰다. 출가 사문 싯닷타는 당대의 빼어난 스승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했다. 그러나 그 어떤 스승도 그가 구하는 바를 줄 수는 없었다. 그가 몸소 겪은 갖가지 뼈아픈 고행(苦行)들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어떤 도움도 받지않고 스스로 명상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볼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깊은 명상 속에서 찾고 또 찾았다. 마침내 스승들에게서 얻지 못한 진리를 혼자의 힘으로 깨달았다[智慧]. 밝음[明]이 생겨났고, 모든 사물을 참 모습대로 밝히는 빛[光]이 생겨났다. 6년에 걸쳐 초인적 고투를 벌인 싯닷타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의 도움이나 인도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지혜에 의지하여 모든 번뇌를 뿌리 뽑고 집착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통찰지로 모든 사물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얻어, 서른다섯 나이에 정각자,
부처님이 되었다. 그분의 굳건한 의지, 심오한 지혜, 보편적인 사랑, 무한한 자비, 자기를 돌보지 않는
이타행, 위대한 포기, 완벽한 청정, 비길 데 없이 독특한 생애, 가르침을 설하는데 쓰셨던
훌륭한 방법들과 성공적인 결과, 이 모든 점들로 미루어 볼 때 부처님은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서 온 인류의 존경을 받으시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엄밀히 말해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신앙과 숭배의 체계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초자연적 신에 대해 충성을 바칠 의무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하다. 불교는 부처님의 제자들을 이끌어 청정한 삶을 살게 하고 또한 그들의 생각 자체를 청정하게 만들어 마침내 최상의 지혜[大覺]를 얻게 하고 모든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는 길이다. 불교에선 맹목적 믿음은 설자리가 없고 오직 지혜를 바탕으로한 확신이 있을 뿐이다.
불자는 부처님을 유일무이의 지도자와 스승으로 받들어 그에게 귀의하지만 맹목적으로
복종하지는 않는다. 불자는 경전에만 얽매이는 사람도 아니요, 또 부처와 같은 존재에
예속된 노예도 아니다. 불자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채로, 자유로운 의지를
활용하고 지혜를 계발하여 끝내는 부처의 경지에까지도 이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佛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불단에 꽃이나 다른 공양물을 올리는 등 부처님을 공경하는 의식을 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살아 계신 동안 사람들로부터 높이 추앙을 받으셨으나 한번도 자신을 신격화한 적은 없었다. 그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다만 놀랄 만큼 비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부처님만큼 신이 아니면서도 또한 그렇게 신처럼 거룩했던 스승도 없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 불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맹종이 아니라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준수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나를 제대로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일깨워 주셨다. 불교에는 불교도가 복종하고 두려워해야할 창조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인간
위에 보이지 않는 전능의 신을 설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올바른 가치를 인정하여 그
위상을 정립하셨다. 불교는 인간이 하나님이나 성직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기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에는, 이해가 되지않는 것을 굳이
믿어야하는 교리도 없고, 이치를 떠나 믿음으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교의도 없으며,
신자가 되기 위해 치뤄야 할, 허례적 의식이나 예식도 없고, 속죄를 위해 해야한다는
무의미한 희생이나 고해의식도 없다. 그러나 종교가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구원의 체계라고 한다면, 불교는 종교 중의 종교인 것이다. 불교의 근간은 이른바 모든 존재에 연관이 되는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첫번째 진리는 고(苦:Dukkha)를 밝히고 있다. 이 빨리어의
둑카(Dukkha)는 고(苦)를 의미하며 영어로 흔히 suffering(괴로움) 또는 sorrow(불행,
슬픔)로 번역되고 있다.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삶이 곧 괴로움(苦)이다. 모든 존재는
태어나게 되어있고 태어난 것은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생 노 병사라는 괴로움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또한 괴로움이다. 한마디로 이 몸뚱이 자체가 바로 괴로움의 근원인 것이다. 첫번째 진리인 고성제에 대한 올바른 정견은 갈애를 없애주며 두번째 진리인 집성제에서는 중생들이 감각의 대경*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밝히고 있다. 이 갈애가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윤회를 되풀이하게 하고, 인생의 온갖 고통을 겪게 하는데 그것이 거칠든 미세하든간에 그 힘은 몹시 위력적이다. 이 무서운 적인 갈애를 굴복시키는데는 그것을 무찌를만한 힘을 동원해야만 한다. 그 힘이 곧 팔정도(八正道)이다. 세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멸성제[滅聖諦]는 괴로움(苦)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으로 그것은
모든 종류의 갈애를 남김없이 없애버림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괴로움의 소멸은
열반이며 바로 불교의 최고선(最高善)으로서 만일 구도자가 이를 목표로 정진해 나간다면
바로 이 생에서도 성취될 수 있다. 모든 악행은 삼가고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세 가지 진리는 부처님 가르침의 철학적 측면이고, 네번째 진리인
도성제는 그 철학에 따른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실로 불교는 온전한 너그러움으로 흠뻑 배어있고 그 정신은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 두루 미친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노예제도를 없애고저 한 분은 바로 부처님이었다. 그리고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카스트제도에 반대하고 모든 이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역설한 분도 부처님이었다. 그분은 신분계급, 피부색,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자격을 갖춘 남녀를 위해 비구 비구니 교단을 세우셨으니, 그 교단의 구성이야말로 참으로 민주적이었다.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성들에게 자각시킨 분도 바로 부처님이었다. 무고한 동물을 희생으로 죽이는 것을 금하게 하고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모든 중생들에 대해 메따(Mettaa, 혹은 자애심을 펼칠 것을 간곡히 권하신 분도 또한 부처님이었다. 오로지 불교의 이 자비심만이 분리주의를 조장하는 모든 벽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 불자에게는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이 따로 없고 적대자나 이방인도 없으며 배교자(背敎者)나 불가촉천민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적 사랑이 정견을 바탕으로 실현될 때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을 한 형제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불자는 지방이나 국가에 대한 편견, 애착 따위는 초월한 세계시민이다. 불교는 이치에 맞고, 실천 가능하고, 효험이 있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참으로 독자적인 가르침이다. 또한 모두를 화합시키는 힘 가운데 가장 수승하고, 사바세계의 중생을 향상시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지렛대인 것이다. 불교의 진수인 사성제만큼이나 기본을 이루는 교의는 업과 윤회인데, 이 둘은 서로 밀접하게 맞물려있는 관계이다. 이 업과 윤회사상은 부처님 이전시대에도 인도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체계화시키신 분은 바로 부처님이셨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업이란 도덕적 인과율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업은 선한 의도와 불선한 의도(kusala akusala cetanaa)를 뜻한다. 업은
지금까지 지은, 그리고 현재 짓고 있는 행위의 총화(總和)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또 미래의 우리는 현재 자신이 하는 행위들이 가져올
결과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과거에 지은 업이 한꺼번에 드러난 총체적 결과는
아니고 미래의 우리 역시 지금 짓는 업이 한꺼번에 드러난 총체적 결과는 아니다. 현재는
정녕 과거의 소산이자 미래의 모태이기는 하나 그렇다고해서 현재를 항상 바로 앞의
전생이나 바로 이어지는 내생을 그대로 가리키는 적확한 지표라고 할 수는 없다. 그만큼
업의 법칙은 실로 대단히 복잡하다. 요는 누구나 심은대로 금생이나 내생에 그 과보를
거둘 것이며, 지금 거두고 있는 것은 과거나 현재 어느 때엔가 우리가 심었던 것이다. 윤회는 지은 업이 있으면 반드시 따라오는 결과이다. 또한 성불을 목표로 하는 보살도(菩薩道)의 이상과 그와 관련된 해탈의 원리는 이 윤회사상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재생을 조건짓는 것은, 다름아닌 업이다. 과거생에 지은 업은 현생의 태어남을 조건짓고, 금생에 지은 업은 과거의 업과 결합하여 내생을 조건짓는다. 현재가 실재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므로 아무런 증명도 필요없으나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과 기록에 의존함으로써만 알 수 있고 미래의 모습은 예견과 추리에 의해 헤아릴 수 있다. 불교의 윤회사상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재육화(再肉化)나 하나의 영혼이 한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가 태어난다는 환생(還生)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신이 창조했거나 또는 최고아(最高我:Paramaatmaa)에서 나온 전생불변(轉生不變)하는 영혼의 실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살아있는 존재[有情]란 마음과 몸[名色]이 끊임없이 변천하며 유전(流轉)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되는 이 정신적, 물질적 현상의 전 '과정'을 부처님은 때때로 통상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자아(自我), 즉 아따(Attaa)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과정에 붙인 이름일 뿐, 그렇게 명명(命名)될 수 있는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눈에 보이는 개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불변하는
주체나 영원한 실체는 부정하지만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과정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철학에서 개별아(個別我)를 가리키는 용어는 흐름 또는 연속을 의미하는
산따띠(santati)이다. 오로지 팔정도 수행을 통해 끝을 내지 않는한, 업에 의해 조건지어진
명색의 끊임없는 흐름 또는 연속은 과거 어느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고, 또 언제까지
이어질런지도 알 수 없다. 다른 종교에서 주장하는 영원한 자아나 항구적인 영혼을 두고
불교는 끝없이 이어지는 흐름이라고 설명한다.
냐나띨로까 지음 Influence of Buddhism on a People NYANATILOKA MAHATERA (BODHI LEAVES NO.A1)
이제 불교의 교리가 사람들의 성향과 행동에 얼마나 유익한 영향을 주는 가르침인지를 밝혀보기로 하자. 불교는 인간이 혼자 서게 해주고 자신감을 심어주며 능력*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해
준다. 불교만큼 능력이야말로 모든 선한 일의 뿌리임을 거듭 강조하고, 정신적 무기력과
게으름*을 단호하게 경계하는 종교적 가르침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도 "해탈에 이르도록 방일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 였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이 거듭 깨우치게되는 것은 자기자신과 자신의 노력에만
의지해야할 것이며, 천상 천하 그 어디에도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과보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줄 존재가 따로 없다는 사실이다. 불자라면 어떤 신(神)이나 교회도, 어떤 제의(祭儀)나 사제(司祭)도, 자신을 도와주고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되고 그리하여 자기 확신에 이르게 된다. 사람이 신이나 어떤 가상의 힘에 의존하게 되면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이 약화되기 마련이고 그 반대로 자신의 능력을 굳게 믿는 사람이 확고하고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름지기 무엇이든 전통이나 권위에 끌려 믿어서는 안되며, 누구라도
자기완성과 해탈을 성취코자 하는자는 독단적 교리나 신앙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자신의
이해력과 사고력에만 의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단적 믿음은 편협한 마음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독단적 태도를 취했다하면 곧이어 편협심이 뒤따르게 되어있다. 여기서 잠시
서양의 중세를 돌아보자. 사회발전과 도덕 지식 예술 과학 철학 등 모든 분야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발전하는 것은 사고의 융통성과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종교적, 정치적 구속과 편견이 판을 치고 국민의 자유가 탄압을 받는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처럼 편견없는 아량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존재를
감싸안는 보편적인 자비심[빨리어로 '메따'(Mettaa , 산스크리트어로는
마이뜨리(Maitri)]이다. 남에게 인정과 사랑을 베푸는 이 자비심이야말로 불교가 모든
도덕적 사회적 발전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는 것이다. 실제로 참다운 불교국가의 분위기는
모든 존재를 감싸안는 자비심으로 충만해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계명을 무턱대고
따라서가 아니라,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아래로는 한낱 지렁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똑같은 생존의 조건과 법칙을 따르게 되어있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불교에서만큼 보편적인 자비심과 무사무욕의 사랑을 선명하게 정의하고 있는 가르침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는 계명은 엄밀히 말하자면
막연하고 모호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 제 각각이고
때로는 이성을 잃은 사랑도 서슴지 않으니까.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전 우주를, 그 높은 곳, 그 깊은 곳, 그 넓은 곳 이제 어느 종교의 다음과 같은 선언과 설교가 얼마나 억지소리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참된 불교정신이 체질화된 국민은 종교적, 국가적, 정치적 편견이나 증오 따위란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전쟁 특히 도발적인 전쟁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강도나 살인자들이 너희 사지와 관절을
자른다해서 화를 낸다면 너희들은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같은 상황
속에서도 너희들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단련해야 하느니라." "증오는 결코 증오로는 가라앉지 않고 불교는 한번도 총칼을 쓰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마디 더하자면 이 보편적 자비심,'메따'는 초기 불교시대로부터 불교국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왔다. 그런 나라에서는 전국의 주요도로상에 지친 여행객을 위한 무료 쉼터를 만들었고, 목마른 자를 위해 항상 시원한 물이 담긴 물항아리를 놓아두었고, 사람과 동물 모두가 먹고 마실 음식을 마련하였으며, 병든 사람이나 동물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약을 나누어 주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필딩 홀의 훌륭한 저서 '어느 국민의 영혼'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 책에는 불교국가인 미얀마 국민의 모습이 생생하고도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불교국 국민의 성품에 커다란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불자들이 지켜야할 오계 중에 술과 약물 등 취할 것을 마시지 말라는 계율이 들어
있음으로써 그들이 천박하거나 흉포하지 않게 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술에 취하게 되면 주독(酒毒)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이성을 잃는 상태가 되며,
끝내는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과음은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 기능에
장애를 일으켜 성질을 고약하게 만들고, 정신을 마비시켜버린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서구에서 흔히들 넘겨짚듯이 국민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종교가 아니다. 반대로 이 세상 그 어떤 종교보다도 국민의 성격과 태도를 향상시키고 고양시키는데 적합하다. 불교는 한 국민의 자존심과 책임감을 일깨워주고 그 나라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또한 인간 본연의 능력인,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힘에 호소하여 정신의텝향상을 촉진시켜 준다. 그리고 국민들이 종교적, 국가적 편견을 떨쳐내고, 광신에 빠지지않게 함으로써 더욱 넓은 포용력을 가지게 해준다. 불교는 국민들 마음 속에 모두를 감싸안는 자비심과 형제애를 심어주어 증오심과 잔인성을 없애준다. 또한 불교는 술이나 약물 등을 금함으로써 국민이 늘 맑고 냉철한 정신을 유지하게 한다. 요컨대 불교는 인간의 모든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있으며, 어떠한 신이나 부처님도 궁극의 목표에 데려다줄 수 없기에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의 힘과 통찰력을 향상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줌으로써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불어넣어 준다. 따라서 자기 존중의 태도, 자신감, 이해심, 너그러움, 모든 것을 감싸안는 자비심, 명정한 정신, 사고의 자주성 등이 불교의 영향을 받는 국민들 사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점들이다. 이러한 장점들이 널리 자리잡고 있는 나라에서는 평화와 행복이 충만할 것이다. 그러한 나라야말로 전세계가 바라마지 않는 모범국가가 될 것이고 바로 지상의 낙원이 될 것이다. ◀TOP ∥◀이전화면 ∥
주 해 *1) 드와이트 고다드 지음, 「불자성전」 참조. *2) 감각의 대경:육외처(六外處), 즉 형태, 소리, 냄새, 맛, 몸의 감촉 대상, 사유의 대상을 가리킨다. 보리수 잎 복 일곱, '경전에 나오는 비유담 몇 토막', 11쪽 참조. *3) 보리수 잎 일곱, '경전에 나오는 비유담 몇 토막', 24쪽 참조. *4) 여기에서 능력은 五根 가운데 하나인 energy를 의미한다.보리수 잎 하나 '영원한 올챙이', 49쪽 참조. *5) 무기력과 게으름:懈怠와 昏沈, 법륜 팔 '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방법',29쪽 참조. *6) 법륜 둘 '구도의 마음, 자유-깔라마경', 11쪽 참조. *7) 지오르다노 브루노:1600년 로마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화형당한 이탈리아 철학자. *8) 보리수 잎 스물 여섯 '오계와 현대사회', 28쪽 참조.
|
(사) 고요한 소리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72 번지. 전화: 739-6328, 725-3408, 전송: 723-9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