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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덟

불교 이해의 첫걸음

불교와 대중

 

나라다 스님/냐나띨로까 스님 지음
김한상/전채린 옮김

 


불교 이해의 첫걸음

An Outline of Buddhism

나라다 스님 지음/ 김한상 옮김

NARADA THERA
(BODHI LEAVES NO.A1)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기원전 623년 5월 보름날, 네팔 변경에 있는 까삘라와투에서 석가족의 왕자, 고따마 싯닷타가 태어났으니 그분은 장차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이 되실 분이었다.

왕자는 열여섯 되던 해 아내를 맞았고 아들 라훌라를 두었다. 스물아홉이 되기까지 그는 아내와 더불어 행복하고 호사스러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생각이 깊고 자비로웠던 싯닷타 왕자는 세속적 쾌락만을 안겨주는 덧없는 왕궁 생활을 즐기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랐으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꼈다. 안락하고 유복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는 세상 어디에나 고통이 있게 마련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장래에 부처님이 될 분에겐 온갖 세속적 유혹들이 있는 왕궁은 더이상 머무를 곳이 못 되었다. 즉 그분이 출가할 때가 무르익었던 것이다. 범부들이 그토록 구해마지 않는 감각적 쾌락이 얼마나 무익한 지를 깨닫고, 현자들이 환희심을 구해 떠나는 출리(出離)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깊이 인식하자, 왕자는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온갖 세속의 쾌락을 등지고 사문(沙門)의 황색 가사 하나만을 두른 채 진리와 평화를 찾아 홀홀히 방랑의 길에 나섰다.

출가 사문 싯닷타는 당대의 빼어난 스승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했다. 그러나 그 어떤 스승도 그가 구하는 바를 줄 수는 없었다. 그가 몸소 겪은 갖가지 뼈아픈 고행(苦行)들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어떤 도움도 받지않고 스스로 명상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볼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깊은 명상 속에서 찾고 또 찾았다. 마침내 스승들에게서 얻지 못한 진리를 혼자의 힘으로 깨달았다[智慧]. 밝음[明]이 생겨났고, 모든 사물을 참 모습대로 밝히는 빛[光]이 생겨났다.

6년에 걸쳐 초인적 고투를 벌인 싯닷타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의 도움이나 인도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지혜에 의지하여 모든 번뇌를 뿌리 뽑고 집착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통찰지로 모든 사물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얻어, 서른다섯 나이에 정각자, 부처님이 되었다.
부처님은 몸소 가르치신 모든 덕성의 완전한 구현체이시며 심오한 지혜와 그에 걸맞는 무량한 자비심을 타고난 분이시다. 45년동안 사사로운 정을 떠나 쉴새없이 모든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노력하신 부처님은 8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드실때 당신을 대신할 어떠한 후계자도 남기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다만 당신의 법(法)과 율(律)만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당부하셨다.

그분의 굳건한 의지, 심오한 지혜, 보편적인 사랑, 무한한 자비, 자기를 돌보지 않는 이타행, 위대한 포기, 완벽한 청정, 비길 데 없이 독특한 생애, 가르침을 설하는데 쓰셨던 훌륭한 방법들과 성공적인 결과, 이 모든 점들로 미루어 볼 때 부처님은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서 온 인류의 존경을 받으시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부처님이 설하신 도덕적, 철학적인 체계는 법(法)이라고 불리우며, 널리 불교라고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이 체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신앙과 숭배의 체계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초자연적 신에 대해 충성을 바칠 의무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하다. 불교는 부처님의 제자들을 이끌어 청정한 삶을 살게 하고 또한 그들의 생각 자체를 청정하게 만들어 마침내 최상의 지혜[大覺]를 얻게 하고 모든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는 길이다.

불교에선 맹목적 믿음은 설자리가 없고 오직 지혜를 바탕으로한 확신이 있을 뿐이다. 불자는 부처님을 유일무이의 지도자와 스승으로 받들어 그에게 귀의하지만 맹목적으로 복종하지는 않는다. 불자는 경전에만 얽매이는 사람도 아니요, 또 부처와 같은 존재에 예속된 노예도 아니다. 불자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채로, 자유로운 의지를 활용하고 지혜를 계발하여 끝내는 부처의 경지에까지도 이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佛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불자들은 물론 부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받들지만 부처님은 한번도 자신이 초자연적 권능자라는 식의 주장을 하신 적이 없다. 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의 직접적 깨달음만이 진리를 점검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그 깨달음의 관건은 합리적인 이해[正見]이다.

불자들이 불단에 꽃이나 다른 공양물을 올리는 등 부처님을 공경하는 의식을 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살아 계신 동안 사람들로부터 높이 추앙을 받으셨으나 한번도 자신을 신격화한 적은 없었다. 그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다만 놀랄 만큼 비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부처님만큼 신이 아니면서도 또한 그렇게 신처럼 거룩했던 스승도 없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 불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맹종이 아니라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준수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나를 제대로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일깨워 주셨다.
더더욱 '세속적 욕망을 성취하려는 기도'나 '자기중심적 사고를 강화시키는 기도'등은 불교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불교에서는 자제와 극기와 심신의 정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하는 명상수행이 핵심을 이룬다.

불교에는 불교도가 복종하고 두려워해야할 창조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인간 위에 보이지 않는 전능의 신을 설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올바른 가치를 인정하여 그 위상을 정립하셨다. 불교는 인간이 하나님이나 성직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기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에는, 이해가 되지않는 것을 굳이 믿어야하는 교리도 없고, 이치를 떠나 믿음으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교의도 없으며, 신자가 되기 위해 치뤄야 할, 허례적 의식이나 예식도 없고, 속죄를 위해 해야한다는 무의미한 희생이나 고해의식도 없다.
칼 막스는 "영혼(靈魂)이라고는 없고 순전한 조건일 뿐인 이 세상에서 영혼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종교이고, 또한 무정한 세상에서 마음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종교이니 종교야말로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불교는 정녕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종교가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구원의 체계라고 한다면, 불교는 종교 중의 종교인 것이다.

불교의 근간은 이른바 모든 존재에 연관이 되는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감각[想]능력과 의식[識]을 갖춘 이 한 길 몸뚱이 속에 세상과 세상의 기원, 세상의 소멸 그리고 세상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나는 천명하노라."(상응부 I.p.86)이 중요한 구절은 부처님이 스스로 직관력을 통해 발견한 사성제를 가리키고 있다.
이 진리는 부처들의 출현과 관계없이 항상 존재하는 것인데 미망에 빠진 세상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밝혀주는 이는 부처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도 않고 변할 수도 없는 이 진리를 부처님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체득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 그것은 전대미문의 진리였다. 따라서 불교가 힌두교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은 온당치 못하다. 양자가 어느 정도 근본교리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그것은 일부 근본 교리들이 영원한 진리인, 법(法:Dhamma)에 부합되기 때문인 것이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첫번째 진리는 고(苦:Dukkha)를 밝히고 있다. 이 빨리어의 둑카(Dukkha)는 고(苦)를 의미하며 영어로 흔히 suffering(괴로움) 또는 sorrow(불행, 슬픔)로 번역되고 있다.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삶이 곧 괴로움(苦)이다. 모든 존재는 태어나게 되어있고 태어난 것은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생 노 병사라는 괴로움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또한 괴로움이다. 한마디로 이 몸뚱이 자체가 바로 괴로움의 근원인 것이다.
고성제(苦聖諦)는 이른바 존재를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와 삶의 여러 측면들에 관한 진리로서, 면밀히 분석 검토, 고찰해야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점검을 해야만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 괴로움의 원인을 갈애(渴愛), 애착(愛着)으로 파악한 것이 두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집성제(集聖諦)이다. 이 갈애는 보이지는 않으나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강력한 정신적 힘이며, 다양하게 나타나는 삼라만상의 근본 원인이면서, 그 현상 뒤에 가려진 실체들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 집성제는 간접적으로 지나간 과거생과 금생 그리고 다가올 내생의 태어남들을 밝히고 있다.

첫번째 진리인 고성제에 대한 올바른 정견은 갈애를 없애주며 두번째 진리인 집성제에서는 중생들이 감각의 대경*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밝히고 있다.

이 갈애가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윤회를 되풀이하게 하고, 인생의 온갖 고통을 겪게 하는데 그것이 거칠든 미세하든간에 그 힘은 몹시 위력적이다. 이 무서운 적인 갈애를 굴복시키는데는 그것을 무찌를만한 힘을 동원해야만 한다. 그 힘이 곧 팔정도(八正道)이다.

세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멸성제[滅聖諦]는 괴로움(苦)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으로 그것은 모든 종류의 갈애를 남김없이 없애버림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괴로움의 소멸은 열반이며 바로 불교의 최고선(最高善)으로서 만일 구도자가 이를 목표로 정진해 나간다면 바로 이 생에서도 성취될 수 있다.
 물론 열반의 성취는 자기 스스로 해내야할 일이면서도, 그 성격이 논리적 사유를 넘어서는 것이고 따라서 고성제, 집성제가 세간의 진리인 반면, 이 세번째 진리인 멸성제는 출세간적 진리이다. 여기에서 멸이란 순수한 깨달음이다. 그것은 완전한 끊음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진리, 곧 정신적인 눈으로 이해될 수 있는 법(法)인 것이다. 완전한 끊음이란 단지 감각의 외적 대상과의 관계를 끊는 것만이 아니고 실은 외부 세계에 매어달리는 내적 집착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열반이란 탐 套치의 불꽃을 끄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해서 열반이 단지 이 불꽃을 끄는 것만이라고 해서도 안될 것이다. 수단은 목적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불꽃을 끄는 것은 열반을 얻는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열반은 단순히 괴로움을 멈추게 하거나 갈애가 사라지게 하는 것만이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멸이라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열반은 절대적인 상태이고 조건지워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거기에서는 단멸될 것이라고는 없다.
불교는 영구불변하는 영혼, 즉 아트마(Atmaa)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 열반에서 단멸 운운은 어불성설이다.
열반에 관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태어난 것도 아니요, 영원한 것도 아니요, 만들어진 것도 아니요, 형성된 것도 아닌 상태가 있다. 만일 태어나지도 않고, 생성되지도 않고, 만들어지지도 않고, 조건지워지지도 않은 상태가 없다면 태어나고,생성되고, 만들어지고 조건지워진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라."* (감흥어 8장 3절)깨달음의 가르침인 세번째 진리[滅聖諦]를 실현하려면 성스러운 네번째 진리[道聖諦]인 팔정도를 닦지 않으면 안된다. 팔정도는 곧 중도(中道:중용Majjhima Pa.tipadaa)로서 - 그것은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의도[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위[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마음챙김[正念], 올바른 정신집중[正定]이라는 수행방법이다. 팔정도는 강력한 도덕적 정신력을 떨쳐일어서게 하여 인간의 내면에 잠복해있는 악의 힘인 갈애를 쳐부수게 하는 수행방법이다. 이 중도가 바로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이기도 한데, 다음의 아름다운 게송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모든 악행은 삼가고
      선한 일 두루 행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법구경: 183)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세 가지 진리는 부처님 가르침의 철학적 측면이고, 네번째 진리인 도성제는 그 철학에 따른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는 평범한 철학이나 윤리체계에 머물지 않는다. 일반적인 철학이나 윤리체계는 괴로움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과는 무관하게 이론에만 치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인간사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일지 몰라도 불교에서는 단지 기초적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법(Dhamma)은 개인적 체험으로 검증되고 증명될 수 있는 확고한 사실들에 바탕을 둔 도덕적, 철학적 체계이다. 또 불교는 합리적이고 실천적이며, 비밀교의나 강압, 박해, 광신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불교가 2500여 년 동안 부처님을 내세워 한방울의 피도 흘린 적이 없고, 한번도 억지로, 반발심을 사면서까지 개종을 강요한 적이 없이 평화롭게 전파되었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달리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훌륭한 일이다.

실로 불교는 온전한 너그러움으로 흠뻑 배어있고 그 정신은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 두루 미친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노예제도를 없애고저 한 분은 바로 부처님이었다. 그리고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카스트제도에 반대하고 모든 이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역설한 분도 부처님이었다. 그분은 신분계급, 피부색,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자격을 갖춘 남녀를 위해 비구 비구니 교단을 세우셨으니, 그 교단의 구성이야말로 참으로 민주적이었다.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성들에게 자각시킨 분도 바로 부처님이었다. 무고한 동물을 희생으로 죽이는 것을 금하게 하고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모든 중생들에 대해 메따(Mettaa, 혹은 자애심을 펼칠 것을 간곡히 권하신 분도 또한 부처님이었다. 오로지 불교의 이 자비심만이 분리주의를 조장하는 모든 벽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 불자에게는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이 따로 없고 적대자나 이방인도 없으며 배교자(背敎者)나 불가촉천민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적 사랑이 정견을 바탕으로  실현될 때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을 한 형제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불자는 지방이나 국가에 대한 편견, 애착 따위는 초월한 세계시민이다.

불교는 이치에 맞고, 실천 가능하고, 효험이 있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참으로 독자적인 가르침이다. 또한 모두를 화합시키는 힘 가운데 가장 수승하고, 사바세계의 중생을 향상시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지렛대인 것이다.

불교의 진수인 사성제만큼이나 기본을 이루는 교의는 업과 윤회인데, 이 둘은 서로 밀접하게 맞물려있는 관계이다. 이 업과 윤회사상은 부처님 이전시대에도 인도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체계화시키신 분은 바로 부처님이셨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업이란 도덕적 인과율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업은 선한 의도와 불선한 의도(kusala akusala cetanaa)를 뜻한다. 업은 지금까지 지은, 그리고 현재 짓고 있는 행위의 총화(總和)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또 미래의 우리는 현재 자신이 하는 행위들이 가져올 결과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과거에 지은 업이 한꺼번에 드러난 총체적 결과는 아니고 미래의 우리 역시 지금 짓는 업이 한꺼번에 드러난 총체적 결과는 아니다. 현재는 정녕 과거의 소산이자 미래의 모태이기는 하나 그렇다고해서 현재를 항상 바로 앞의 전생이나 바로 이어지는 내생을 그대로 가리키는 적확한 지표라고 할 수는 없다. 그만큼 업의 법칙은 실로 대단히 복잡하다. 요는 누구나 심은대로 금생이나 내생에 그 과보를 거둘 것이며, 지금 거두고 있는 것은 과거나 현재 어느 때엔가 우리가 심었던 것이다.
업은 하나의 독자적인 법칙으로서 밖으로부터 별도의 지배요인의 간섭없이 자기 고유의 장(場) 속에서 스스로 작용한다. 이 업의 법칙으로 고통의 문제, 운명의 불가사의성, 타종교에서 주장하는 예정설, 신동의 탄생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류의 모든 불평등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윤회는 지은 업이 있으면 반드시 따라오는 결과이다. 또한 성불을 목표로 하는 보살도(菩薩道)의 이상과 그와 관련된 해탈의 원리는 이 윤회사상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재생을 조건짓는 것은, 다름아닌 업이다. 과거생에 지은 업은 현생의 태어남을 조건짓고, 금생에 지은 업은 과거의 업과 결합하여 내생을 조건짓는다. 현재가 실재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므로 아무런 증명도 필요없으나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과 기록에 의존함으로써만 알 수 있고 미래의 모습은 예견과 추리에 의해 헤아릴 수 있다.

불교의 윤회사상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재육화(再肉化)나 하나의 영혼이 한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가 태어난다는 환생(還生)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신이 창조했거나 또는 최고아(最高我:Paramaatmaa)에서 나온 전생불변(轉生不變)하는 영혼의 실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살아있는 존재[有情]란 마음과 몸[名色]이 끊임없이 변천하며 유전(流轉)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되는 이 정신적, 물질적 현상의 전 '과정'을 부처님은 때때로 통상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자아(自我), 즉 아따(Attaa)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과정에 붙인 이름일 뿐, 그렇게 명명(命名)될 수 있는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눈에 보이는 개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불변하는 주체나 영원한 실체는 부정하지만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과정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철학에서 개별아(個別我)를 가리키는 용어는 흐름 또는 연속을 의미하는 산따띠(santati)이다. 오로지 팔정도 수행을 통해 끝을 내지 않는한, 업에 의해 조건지어진 명색의 끊임없는 흐름 또는 연속은 과거 어느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고, 또 언제까지 이어질런지도 알 수 없다. 다른 종교에서 주장하는 영원한 자아나 항구적인 영혼을 두고 불교는 끝없이 이어지는 흐름이라고 설명한다.
토마스 헨리 헉슬리는 말한다.
"불교는, 서구식 개념의 신(神)을 부정하고, 인간에게 영혼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영생에의 믿음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어떠한 기구(祈求)나 희생제물의 효험도 인정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구원을 찾되, 고유의 순수성에 의지할 뿐, 복종을 맹세하지 않고 결코 세속 권력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사상체계이다. 놀랍게 불교는 아주 빠른 속도로 세계의 많은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뛰어난 신조가 되고 있다." TOP 이전화면

 

불교와 대중

냐나띨로까  지음
전채린  옮김

Influence of Buddhism on a People

NYANATILOKA MAHATERA

(BODHI LEAVES NO.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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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대중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서구에서는 부처님 교리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사람들은 불교라고하면 으레 신비주의와 미신을 적당히 섞어놓은 것쯤으로 여겼고 그 누구도 오늘날처럼 서방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떠맡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서구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교를 적대시하여 무조건 헐뜯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으면 그 해독이 커서 우울증에 빠지고 염세적이 되며 그리하여 개인의 사회활동이나 국가발전에 유해하다며 자기네 신봉자들을 확신시키려 든다. 그러나 불교를 조금이나마 제대로 알고있거나, 미얀마(버어마) 같은 전통 불교국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그런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알 것이다. 불교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주 행복하고 밝은 국민으로 알려져있다.

이제 불교의 교리가 사람들의 성향과 행동에 얼마나 유익한 영향을 주는 가르침인지를 밝혀보기로 하자.

불교는 인간이 혼자 서게 해주고 자신감을 심어주며 능력*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해 준다. 불교만큼 능력이야말로 모든 선한 일의 뿌리임을 거듭 강조하고, 정신적 무기력과 게으름*을 단호하게 경계하는 종교적 가르침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능력은 불사의 경지에 이르는 길,
그러나 무기력과 게으름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니라."
  
"비구들이여, 나는 불굴의 인내심으로 광명에 이르렀으며,
불퇴전의 노력으로 구극의 평화에 도달할 수 있었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대들 역시 잠시도 쉼없이 노력한다면 머지않아 정견과 깨달음으로 성스러운 무상정각에 이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도 "해탈에 이르도록 방일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 였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이 거듭 깨우치게되는 것은 자기자신과 자신의 노력에만 의지해야할 것이며, 천상 천하 그 어디에도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과보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줄 존재가 따로 없다는 사실이다.
"악업을 짓는 것도 자신이고 청정함을 행하는 것도 자기자신이다. 청정함이나 불순함이나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자신 이외에 그 누구도 자신의 구세주가 될 수 없느니." 불교는 누구든 자신의 선행과 불선행의 책임을 져야하며 오직 자신만이 자기 운명의 모양새를 만들어 갈 수 있을 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악행이 저질러졌다면 그것은 그대 자신이 한 것이지 부모나 친구나 그 누군가의 탓도 아니다. 악행의 과보를 고통스럽게 거두게 될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이니라."

불자라면 어떤 신(神)이나 교회도, 어떤 제의(祭儀)나 사제(司祭)도, 자신을 도와주고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되고 그리하여 자기 확신에 이르게 된다. 사람이 신이나 어떤 가상의 힘에 의존하게 되면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이 약화되기 마련이고 그 반대로 자신의 능력을 굳게 믿는 사람이 확고하고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름지기 무엇이든 전통이나 권위에 끌려 믿어서는 안되며, 누구라도 자기완성과 해탈을 성취코자 하는자는 독단적 교리나 신앙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자신의 이해력과 사고력에만 의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대중들 마음 속에 자기신뢰와 자기확신을 더욱 계발해나가는데 필요한 덕목을 제시해준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단지 풍문이 그러하다고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해서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순전히 그대의 스승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대로 믿지는 말라.
만일 그대 스스로 판단하여 그것들이 악하고 나쁘며, 그대와 남을 불행으로 이끌거라고 생각 된다면 그것들을 버리도록하라."*
사람들에게 스스로 판단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이러한 교의는 대중들에게 참으로 유익한 영향을 끼칠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권위나, 경전이나, 제의나, 전통을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강요하며, 스스로의 점검을 용납하지 않는 교의는 필시 사람의 정신을 침체상태로 몰아갈 게 뻔하다. 정신적 발전은 사고의 자유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권위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판을 치는 곳에서는 어떤 정신적 발전도 이루어질 수 없다. 사고의 자유는 정신적인 활력과 발전을 가져오지만 독단적 견해는 정체를 몰고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단적 믿음은 편협한 마음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독단적 태도를 취했다하면 곧이어 편협심이 뒤따르게 되어있다. 여기서 잠시 서양의 중세를 돌아보자.
피도 눈물도 없는 종교재판, 잔인한 학살, 폭력, 파렴치 행위, 고문, 죄없는 사람들에 대한 화형집행, 그리고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십자군 전쟁들, 이 모든 것은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독단적 믿음과 그와 짝을 이룬 편협심의 결과였다. 독단적 믿음과 편협심은 진보적 노선을 거부하는데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회는 이제 갈릴레오나 지오르다노 브루노*에게 가했던 야만적 방법을 더이상 쓰지 않는다해도 편협심과 잔인한 광신이 현대의 정치판에서 훨씬 더 교활한 방법으로 존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이 난김에 하는 말이지만 갈릴레오와 브루노를 이단으로 몰아 박해하고 유죄 선고를 했던 교회가 그후에 그들의 터무니없는 규정을 공식적으로 폐기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사회발전과 도덕 지식 예술 과학 철학 등 모든 분야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발전하는 것은 사고의 융통성과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종교적, 정치적 구속과 편견이 판을 치고 국민의 자유가 탄압을 받는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처럼 편견없는 아량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존재를 감싸안는 보편적인 자비심[빨리어로 '메따'(Mettaa , 산스크리트어로는 마이뜨리(Maitri)]이다. 남에게 인정과 사랑을 베푸는 이 자비심이야말로 불교가 모든 도덕적 사회적 발전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는 것이다. 실제로 참다운 불교국가의 분위기는 모든 존재를 감싸안는 자비심으로 충만해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계명을 무턱대고 따라서가 아니라,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아래로는 한낱 지렁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똑같은 생존의 조건과 법칙을 따르게 되어있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존재하듯이 그들도 존재한다. 그들이 존재하듯이 나도 존재한다." 이렇듯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와 자신을 동등하게 여겨야하며, 산 것은 그 어느 것도 죽이거나 해쳐서는 안된다.

불교에서만큼 보편적인 자비심과 무사무욕의 사랑을 선명하게 정의하고 있는 가르침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는 계명은 엄밀히 말하자면 막연하고 모호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 제 각각이고 때로는 이성을 잃은 사랑도 서슴지 않으니까.
'메따'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그 어느 것이나 고통받지 않고, 슬픔을 모르고, 행복하기를 마음속 깊이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의 찬가'인 '자비경'은 불교국가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남녀노소 할것없이 한 목소리로 암송하는 기도이며 마음의 양식이다. 여기서 자비경의 모든 사상이 함축되어 있는 게송 두 연(聯)을 읊어 보겠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자식을 보호하듯 그것도 하나뿐인 자식을,
    꼭 그와 같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한없는 자애의 마음을 늘 지니기를.

    전 우주를, 그 높은 곳, 그 깊은 곳, 그 넓은 곳
    끝까지 모두를 감싸는 사랑의 마음을 키워라.
    미움도 적의도 넘어선
    잔잔한 그 사랑을."

이제 어느 종교의 다음과 같은 선언과 설교가 얼마나 억지소리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와 믿음이 다른 자들은 모두 다 짐승이며 겉으로만 인간의 탈을 썼을 뿐이다. 저들이 짐승일진대, 선택된 백성인 우리를 공경할 자격조차 없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너의 적을 만나게 되거든 어디에서건 죽여버려라…
. 그들을 피로 물들여라.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 받아 마땅한 벌이니…." 라고 하고 더 나아가서 "적을 무찔러라, 그들이 무력해질 때까지, 그들이 우리의 신을 경배할 때까지…. 그들이 보복당하는 고통을 겪게 하라."고 까지 하고 있다.
이런 야만적인 계명이 먹혀들여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그로 인해 극도로 파괴적인 힘과 광신, 난폭, 잔학행위 등이 난무하게 되고 그 결과 이 세상에 끔찍한 불행과 재난이 퍼져나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불교의 경전은 참으로 무한한 사랑과 자비, 참으로 무한한 관용을 설하고 있기에 그 어디를 보아도 위와 같은 계명이나 훈계라고는 한 구절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기에 불교포교사나 승려 중에는 이른바 '비신도'들에 대하여 악의나 증오에 찬 설법을 하려들 사람이 없을 것이다.

참된 불교정신이 체질화된 국민은 종교적, 국가적, 정치적 편견이나 증오 따위란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전쟁 특히 도발적인 전쟁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강도나 살인자들이 너희 사지와 관절을 자른다해서 화를 낸다면 너희들은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같은 상황 속에서도 너희들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단련해야 하느니라."
"우리의 정신은 평정을 지키리라. 우리의 입에서는 사악한 말이 한마디도 새어나오지 않으리. 우리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해 호의와 연민으로 충만해있고, 마음 속엔 아무런 원한도 묻어두지 않으리. 우리는 분노와 증오를 모르는 넓고, 깊고, 가없는 자비의 염(念)으로 그들을 감화시키리." 이렇게 모두를 감싸안는 자비심, 즉 '메따'는 한쪽 뺨을 맞았을 때 다른 쪽 뺨도 내밀어야하는 어린양의 적극적이지 못한 사랑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증오는 결코 증오로는 가라앉지 않고
    오직 온화함으로만 가라앉는다."

불교는 한번도 총칼을 쓰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부처님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부처님의 이름으로든, 그분의 교리를 전파한다는 명목으로든 단 한방울의 피도 흘린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다른 종교들은 어떠했는가? 여기서 개종을 강요하며 자행한 숱한 야만적 방법들을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다.
부처님께서는 지혜와 해탈을 증득함에 있어 무턱대고 믿는 신심이나 피상적인 종교의식은 아무 쓸모도 없다고 가르치듯이 불교에서는 형식적인 개종이란 아무 의미도 없다. 강제로 불교를 포교하겠다는 것은 마치 강압과 불의를 써서 정의와 사랑을 널리 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불제자들은 남들이 자기를 불자라고 부르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아서 개종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것은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목표에 가깝게 다가가는 길은 스스로 바른 견해를 갖추고 분발 정진하는데 있음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불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덕성과 지혜를 갖추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도(正道)를 알아 그들 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

한마디 더하자면 이 보편적 자비심,'메따'는 초기 불교시대로부터 불교국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왔다. 그런 나라에서는 전국의 주요도로상에 지친 여행객을 위한 무료 쉼터를 만들었고, 목마른 자를 위해 항상 시원한 물이 담긴 물항아리를 놓아두었고, 사람과 동물 모두가 먹고 마실 음식을 마련하였으며, 병든 사람이나 동물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약을 나누어 주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필딩 홀의 훌륭한 저서 '어느 국민의 영혼'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 책에는 불교국가인 미얀마 국민의 모습이 생생하고도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불교국 국민의 성품에 커다란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불자들이 지켜야할 오계 중에 술과 약물 등 취할 것을 마시지 말라는 계율이 들어 있음으로써 그들이 천박하거나 흉포하지 않게 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님은 사람을 취하게 하는 음료를 마시지 말라고 경고하셨고 그런 것들이 인간의 정신과 성격과 도덕성에 얼마나 해를 끼치는지를 분명하게 지적하셨다. 어쩌다 조금만 마셔도 술은 우리 몸과 마음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술을 마시고 취하게 되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이 흐려지고, 도의심과 죄의식이 희미해진다. 한마디로 말해서 술이나 약물은 사람의 윤리의식을 둔화시키고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든다. 얼마나 많은 순진한 청소년들이 술이나 약물 때문에 악덕의 희생물이 되고 끝내 죄를 저질러 옥살이까지 하게 되는지는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람이 술에 취하게 되면 주독(酒毒)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이성을 잃는 상태가 되며, 끝내는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과음은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 기능에 장애를 일으켜 성질을 고약하게 만들고, 정신을 마비시켜버린다.
윤리적으로 무감각해지고, 난폭해지고, 잔인해지는 것도 술이나 약물복용이 주범인 경우가 허다하다. 음주행위를 자제하는 국민은 늘 맑은 정신으로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자기통제를 잘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서구에서 흔히들 넘겨짚듯이 국민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종교가 아니다. 반대로 이 세상 그 어떤 종교보다도 국민의 성격과 태도를 향상시키고 고양시키는데 적합하다. 불교는 한 국민의 자존심과 책임감을 일깨워주고 그 나라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또한 인간 본연의 능력인,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힘에 호소하여 정신의텝향상을 촉진시켜 준다. 그리고 국민들이 종교적, 국가적 편견을 떨쳐내고, 광신에 빠지지않게 함으로써 더욱 넓은 포용력을 가지게 해준다. 불교는 국민들 마음 속에 모두를 감싸안는 자비심과 형제애를 심어주어 증오심과 잔인성을 없애준다. 또한 불교는 술이나 약물 등을 금함으로써 국민이 늘 맑고 냉철한 정신을 유지하게 한다. 요컨대 불교는 인간의 모든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있으며, 어떠한 신이나 부처님도 궁극의 목표에 데려다줄 수 없기에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의 힘과 통찰력을 향상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줌으로써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불어넣어 준다. 따라서 자기 존중의 태도, 자신감, 이해심, 너그러움, 모든 것을 감싸안는 자비심, 명정한 정신, 사고의 자주성 등이 불교의 영향을 받는 국민들 사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점들이다. 이러한 장점들이 널리 자리잡고 있는 나라에서는 평화와 행복이 충만할 것이다. 그러한 나라야말로 전세계가 바라마지 않는 모범국가가 될 것이고 바로 지상의 낙원이 될 것이다. TOP 이전화면

 

주 해

*1) 드와이트 고다드 지음, 「불자성전」 참조.

*2) 감각의 대경:육외처(六外處), 즉 형태, 소리, 냄새, 맛, 몸의 감촉 대상, 사유의 대상을 가리킨다. 보리수 잎 복 일곱, '경전에 나오는 비유담 몇 토막', 11쪽 참조.

*3) 보리수 잎 일곱, '경전에 나오는 비유담 몇 토막', 24쪽 참조.

*4) 여기에서 능력은 五根 가운데 하나인 energy를 의미한다.보리수 잎 하나 '영원한 올챙이', 49쪽 참조.

*5) 무기력과 게으름:懈怠와 昏沈, 법륜 팔 '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방법',29쪽 참조.

*6) 법륜 둘 '구도의 마음, 자유-깔라마경', 11쪽 참조.

*7) 지오르다노 브루노:1600년 로마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화형당한 이탈리아 철학자.

*8) 보리수 잎 스물 여섯 '오계와 현대사회', 2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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