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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도전

아이. 비. 호너 지음

전 병 재 옮김


재가 불자를 위한 이정표

시따 파울릭 뿔레-렌프류 지음

이 성 재 옮김


차 례


 ․ 법의 도전  5

 ․ 재가 불자를 위한 이정표  33



*본문의 주는 원주(原註)이며 역주(譯註)일 경우 따로 [역주]라고 표기하였음.

법의 도전

The Challenge Of Dhamma




I. B. Horner 지음

전 병 재 옮김



*1961년에 런던 불교정사(London Buddhist Vihāra)에서의      법문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Bodhi Leaves A.No.12, 1962)



법의 도전


저는 항상 웨삭 축제1)야말로 특별히 진지한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축제는 즐기는 기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간을 중대한 도전의 기회로 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해마다 한 번씩 부처님을 회상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내부로부터 새로운 기운으로 충전시키고 순화시키도록 요구받는 계기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축제야말로 진지한 기간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 모이신 여러분은 아마도 불교라는 가르침과 만났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인생에 변화를 일으키신 분들일 것입니다. 변화의 정도는 제각기 다를 테지만요. 우리들은 전혀 새로운 세계를 거기서 발견하고 이를 더 잘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앎과 동시에 실천을 요구해 마지않는 공부인 것 같습니다. 이 가르침은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심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동물에 대한 자비행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당장 이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인간적 윤리를 제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오계(五戒)입니다. 이런 윤리는 일단 알고 나면 각자가 힘닿는 껏 계율을 잘 지키고자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물론 선(善)은 선을 위한 선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다고 선을 등한시할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나옵니다.


“선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이 정도야 무슨 영향을 미칠라구’생각하면서.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는 물로

항아리가 가득 차게 된다.

현명한 사람은 이와 같이 조금씩 조금씩 선을 모아

자신을 선으로 가득 채운다.”2)


이처럼 선으로 자신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선, 그 자체를 절대적이라 할 만큼 크나큰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선이 갖는 가치는 결국 도구적인 성격의 것입니다. 선은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를 따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높고 가장 알차고 완벽하게 실현된 선의 목표는 결코 단순한 윤리적인 내용에 그치지 않으며 훨씬 더 크고 깊은 것들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에 따르면 우리가 선 여부를 판단기준으로 삼을 경우 우리는 선택에 직면할 때마다(선택이라는 의도적 행위는 우리가 짓는 개인적 업의 작용결과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반드시 영향을 미칠테니까), 그리고 몸과 말과 생각을 통해 행동하고 처신하는 데 있어 더 나은 길을 선택할 때마다, 또는 어떻게 해서든 가장 나은 선택, 즉 그 선 자체를 선택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그만큼 더 진리의 대도(大道)를 나아가고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옛 길


과거의 부처님들[過去佛]이 발견하고 걸었던 이 진리의 대도3)를 고따마 부처님도 36세 되던 해 어느 날 밤 붓다가야의 네란자라 강 둑 근처에 있던 보리수[지혜의 나무] 아래에 앉아 선정에 깊이 들어 계시던 중에 발견해냈습니다.

이 옛 길, 과거불들의 시대가 끝나면서 안 쓰이게 되었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다시 알려지게 된 대도가 곧 팔정도로서, 피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일체가 고요한’4) 저 피안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수행과 방법도 제시해 줍니다. 이 피안을 수행의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마음이 여느 식(識)을 초월, 확장된 영역에서, 산만하고 끊임없이 생멸하는 일체의 느낌[受]들에 초연할 수 있게 된 경지, 느낌들을 조복받아 더 이상 느낌을 욕구하지 않는 경지입니다.


부처님은 이 길을 뗏목에 비유했습니다. 뗏목은 열반 또는 불사(不死)에 드는 순간, 다시 말해 피안에 이르는 순간 버려지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뗏목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열반에의 도달, 불교 윤리와 더불어 팔정도의 근간을 이루는 ‘마음 개발’과 ‘마음 통어(統御)’의 목표이기도 한 이 열반에의 도달은 반드시 먼 후일을 기약해야 하는 일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 개발’과 ‘마음 통어’를 힘써 주창하시고 명상체계를 통해 이를 실현할 수 있게끔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힘입어 열반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지금 이 생에서도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는 ‘순간’에, 현재에 속하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합니다. 노력은 현재에 속합니다. 근면, 활력, 그리고 단호함 역시 그러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불교의 주요 덕목들입니다. 팔정도로 나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현재에 속하며 어쩌면 팔정도의 끝에 이르는 것, 즉 대단원 역시 현재에 속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즉 느낌을 즐기려는 우리들의 욕구와 그 즐김의 위험성에 대한 우리 각 개개인의 심각한 무지로 인해 우리가 지금껏 헤어나지 못하고 얽매어 있는 윤회의  고리, 재생의 연쇄를 우리가 개인적 노력 분투에 의해 지금 여기서 끝장낼 수 있다는 것, 그럼으로써 무수한 겁 동안 받아온 고통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웨삭 축제일을 통해 기리는 일 중의 하나인 부처님의 최종적이며 완전한 열반, 즉 반열반(般涅槃)은, 그리고 과거의 일부 아라한들의 반열반 역시 그분들이 오온5)을 한 끄트러기도 남기지 않고 없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느낌들을 경험하고 싶어하고, 삶[苦存]을 지속시키고 싶어하는 자신들의 들끓는 욕구들을 완전히 뿌리 뽑았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 실제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행복 찾기


느낌의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넘어서는, 더 큰 행복을 발견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애를 바쳐야 합니다.6) 우리 모두 부처님의 전생(前生) 이야기인 『쟈타카[本生談]라는 훌륭한 경전을 알고 있습니다. 그 오백마흔일곱 가지 이야기를 보면 우리 부처님께서 겁으로 헤아려야 하는 아득한 옛적 디빵까라 부처님[연등불] 아래에서 어느 날 세웠던 서원, 즉 언젠가 스스로 부처가 되어 법을 펴리라는 서원을 이루기 위해 확고한 결심으로 용맹정진 하시던 보살7) 때의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정말로 수행을 완수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심해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현명한 이라면 “대장장이가 은에서 쇠똥을 제거하듯이 점진적으로, 그리고 적절히 때맞추어서 자신의 때를 조금씩 조금씩 벗겨 나갈”8) 테니까요. 남이 나를 깨끗이 만들거나 순화시켜 주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 이렇게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풀어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숙련을 요하는 일에 능숙해 지려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빠마다’ 즉 불방일(不放逸)입니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셨다고 알려진 말씀이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appamādena sampādetha)”였다는 것만 보아도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께서 평생 강조하셨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법구경의 게송을 상기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불방일은 불사로 가는 길이요,

방일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니라.

방일하지 않으면 죽지 않고,

방일하면 이미 죽은 것과 같으니라.”9)


웨삭 축제가 기념하는 일 중에 다시 부처님의 대각(大覺)이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 중 가장 주목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큰일의 결실을 바로 우리가 상속받아 맛보고 있다니 이 얼마나 기뻐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깨달으신 분께서는 이 세상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마음에 새길 준비가 된 세상 사람들에게, 일관성 있고, 논리적이며, 실행 가능하고, 해탈의 성취라는 인간 본분의 일대사에만 집중된 최상의 사유체계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유체계를 실천에 옮기는 방법에 대해서도 지시와 안내의 말씀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 수행방법을 실천하는 사람 개개인에게 이 사유체계는 점차적으로 효과를 발하여 건설적 작용을 하게 됩니다. 이 점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한 인간에 의해서, 우리들이나 다를 바 없이 육체적 본능들에 지배당하기 쉬운, 따라서 정신적 본능에도 제약될 법한 한 인간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점, 뿐만 아니라 그것이 2500년 전에 선언되었다는 점을 저는 특히 의미 깊게 받아들입니다. 더욱이나 가르침은 지금도 죽지 않고, 학문적 관심사 이상의 것으로 생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으며, 효력을 발하고 있으며, 강력하며, 감명적입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재난으로 넘쳐나는 상황에서 선(善)을 받쳐주는 거대한 힘이 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이 언제나 활력과 생기로 충일했다는 점은 인도 바깥의 땅에서도 그것이 잘 보존되었을 뿐 아니라 발전을 거듭해왔다는 사실에서 역력히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지금 동양에서는 이 가르침이 다시 크게 부흥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정신적인 것이 대체로 잘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불교가 수백만 민중들의 진짜 ‘종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르침의 핵심을 이루는 ‘희망’을 소중히 여겨서,  가르침의 합리성과 완벽성을 소중히 여겨서, 그리고 가르침의 목적과 품성 수양의 방법들에 대한 이해말고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 태도를 소중히 여겨서, 외부의 어떤 것에도 의지하도록 요구하지 않는 점을 특히 소중히 여겨 불교에 귀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통어

우리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최종적 승리를 거두게 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윤회의 삶을 겪어야만 하는데, 이 윤회의 삶들이 긋게 되는 선(線)이 어떤 방향으로 굽느냐, 즉 향상 쪽으로 굽는 선이 되느냐 퇴전 쪽으로 굽는 선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자신 혼자만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도록 불자들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사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전장에서 수천 명의 남들을 이기기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훨씬 더 힘든 일입니다.

불교는 자기 극복을 연민, 불해(不害 ahiṁsā)와 함께 기본 교의로 중히 여기며 지켜왔습니다. 그래서 역사에는 불교를 내세운 전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유체계가 다르거나 신앙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불교적 사유나 개종을 강요하기 위해 전쟁이란 극단적 수단을 쓴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말살이나 고문을 위시한 그 어떤 폭력도 결코 쓰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불교의 교화사업은 그 긴 역사에서 볼 수 있듯 오로지 평화적이고 우호적이었습니다. 불자들이 이와 같이 관용적 태도로 일관한 것은 물론 애종심(愛宗心)이 박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정반대가 진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선 불교의 인간관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윤회 중에 각기 제 갈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자질인 분별력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을 수 없다는 인식을 불자들이 확고히 견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다시 업에 대한 인식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저는 구업(口業)에 관한 얘기를 잠시 해보겠습니다. ‘인도문학의 걸작’이라고 리스 데이비즈10)가 부른 『밀린다왕문경(Milindapañha)이라는 저작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전 편찬이 끝난 이후에 이루어진 저작으로 보고 있지만 실제로 미얀마에서는 빠알리경전의 일부로 다루고 있으니까 경으로 간주해도 무난할 것입니다. 이 경전의 편자는 구업 중에서 학자들의 구업과 왕들의 구업 간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특히 주목한 것 같습니다. 학자들은 지식을 열심히 추구하는 가운데 논쟁을 벌이어 논점과 반론을 이끌어냅니다. 그런데 왕들은 일방적으로 처벌을 내리고 심지어 사형을 언도해버립니다.


어느 쪽을 더 찬양해야 할는지는 자명합니다. 여러분은 『본생담』중 「무가파카 본생담11)에 나오는 보살의 굳은 결심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보살은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게 될까봐 매우 두려워한 나머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일을 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어제 아버지 앞에 네 명의 도둑이 끌려왔을 때 아버지는 지옥에 가기 알맞은 포악한 말들을 쏟아내셨다. 나도 통치자가 되었다가는 지옥에 몸을 받기 십상일 테고 그러면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그는 차라리 절뚝발이, 귀머거리, 벙어리 행세를 하고 똑똑한 표를 안 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자신의 결의를, 화려한 왕좌도 마다하고 기어코 집 없는 출가자의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16년 동안이나 그렇게 거짓행세를 하며 버텨냈습니다. 사실 출가자로서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자면 왕의 자리가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잔인성이나 가해성 따위와는 철저히 담을 쌓아야 하겠지요.


이제 제가 본 강연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는 이 ‘진지함’의 또 다른 면에 대해 얘기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불법이라는 이 놀라운 선물이 우리에게 베풀어졌다는 사실을 그저 넘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받기만 할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도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 특히 우리 서구사람들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다소나마 알게 된 귀중한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경전에서 재가자 아나타핀디카가 어떤 부자 상인 친구한테 말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서 부처의 모습을 대하기 어렵고 ‘부처님, 부처님’ 하고 찾는 소리를 접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처 시대, 즉 어느 한 부처의 가르침이 아직도 기억되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평화의 가르침’, 내적 및 외적 평화에 대한 이 가르침을 최대한 멀리, 널리, 그리고 가장 성실하게 펴는 일이 우리의 책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특징적 풍경을 이루는 스트레스와 긴장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으로서 불법을 이용하려 서두르는 일 따위는 마땅히 부차적인 일로 돌려져야 될 것입니다.


옛날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책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비구들의 마음속에 기억으로 전해졌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습니다. 그러다가 종려나무잎 필사본[패엽경]의 시대가 왔습니다. 외우고 있던 것을 글자로 옮긴다는 일이 여간 수고로운 과정이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이루어졌고 그래서 복사본도 만들어졌습니다. 때때로 수요가 생겼고 그래서 이 종려나무 잎 복사본들 중 일부가 더할 수 없이 경건하게 다루어지는 가운데 중국 등과 같은 여러 먼 나라들에까지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 경들은 전부가, 아니면 일부일지라도 산스크리트어나 한문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 경전의 내용을 전개 발전시키거나 경전을 둘러싼 연구를 하는 가운데 치밀한 철학적 논의를 다룬 새로운 글들이 나오게 되고 다시 이에 곁달아 전설이나 의식이 발달해 가면서 불교는 시정인들에게도 점점 친숙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들 새로운 불교의 청중들은 그 옛날의 청중들과 비슷했을 것 같습니다. 달 밝은 밤에 반얀나무 아래에 앉아 본생담의 얘기가 펼쳐져나감에 따라 눈빛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이던 그 옛 청중들 말입니다. 물론 본생담 얘기는 민담 비슷해 보이긴 해도 순수민담과는 달리 항상 불교적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지요. 오랜 시간 후에 인쇄책자의 시대가 왔습니다. 이들은 더 오래가고, 관리하기가 더 쉽고, 사용하기에도 더 편리하며, 더 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가슴에 가 닿을 수 있으며, 필사본을 접했던 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나라에 가르침을 전해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불교의 지식은 실제로 온 지구를 에워싸다시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빠알리어 경전을 구성하는 26권12)을 모두 읽을 수 있으며, 대승불교의 방대한 문헌 중 상당부분을 빠알리어나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한문 기타 등등의 언어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차선책으로 다른 동서양의 언어로 옮겨진 번역물들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옛 주석서들도 있고 보다 근대에 나온 원전 연구 자료도 꽤나 많이 있습니다. 경전 연구 외에도 불교 일반에 관한 책들이 넘칠 만큼 많습니다. 그 중에는 건전하고 근거가 뚜렷한 책도 있는가하면 불교적 내용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책들도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올바른 비판적 안목을 갖추려면 원전을 직접 읽든가 아니면 유능한 권위자에게 신뢰성을 인정받은 번역물을 읽도록 조금 주의를 기울이면 될 것입니다.


다시, 동양은 불교의 전통도 깊을 뿐 아니라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는 데 반해 서양은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물든 독단적 태도 때문에 가뜩이나 피상적인 이해가 더욱 애매모호해지기 쉬운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극력 주장합니다. 이 세상의 선을 위해서 우리가 널리 펴고자 하는 것은 창백한 유령과 같은 불교가 아니라 이 세상의 날로 물질주의에 편중되어 가는 자세들을 저지해 주는 탄막(彈幕)이 될 수 있는 ‘불교’라는 것을.

이러한 불교를 세우는 길은 각자가 명상을 하든, 연구 실천하든, 불교에 관한 글을 쓰든, 가르치고 강연을 하든, 전해 내려온 초기의 경전을 편집 번역하든 간에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의도하셨던 그 불교, 지금도 여전히 그래야만 될 그 불교, 서양사람들도 올바른 뜻으로 ‘불교’라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러한 불교가 되려면 동양과 서양, 이 둘의 결합이 불가결합니다. 이 둘이 한 팀을 이루어 일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불교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충분히 기여할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며 인도의 또 한명의 놀라운 아들인 아쇼카 황제가 법의 북소리로 전쟁의 북소리를 대치시켰던 그 위업을 오늘에 재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재가 불자를 위한 이정표

Guide-posts for buddhists




시따 파울릭 뿔레-렌프류 지음
(
Sita Paulick Pulle-Renfrew )

이 성 재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Bodhi Leaves No. 20, 1964)



재가 불자를 위한 이정표


매인 데가 없는 자유

우리는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의지로 불자가 된다. 혈통이나 인종, 국적과 같은 출신성분 때문에 불자가 되어서도 안 되며, 구속력이 있는 의식절차를 통했다 해서 진정한 불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종교로서의 불교 역시 권위로부터 자유롭다. 불교는 국교로 행세하는 일도 없으며 어떤 세속적 계층이 권위 구축을 위해 이용하려 든다 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몸체를 이루는 승가가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승가란 재가불자들에 비해 진리와 올바른 행위를 추구하는 수행에 있어 좀 더 본격적이라는 점 외에는 재가불자와 어떤 차이도 없고 따라서 특별한 권위도 누리지 않는다.


불교 승려가 가장 승려다워 보일 때가 언제인가 하면, 부처의 길을 명상하고 실천함으로써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향상의 수준을 구현해 보일 때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향상된 인간으로서 그리고 불교생활방식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영예와 존경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런 영예를 받을만하지 못할 경우에도 소홀한 대접을 받을지언정 비난을 받지는 않는다.


불교의 윤리에 따르면, 어느 누구라도, 어떤 권위자라 하더라도, 한 인간에게 그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저급한 행동규율을 강요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당자가 원하는 이상으로 더 높은 수준에서 행위하도록 만들어 줄 수도 없다. 각자는 자신이 이룬 향상 수준에 따라 행위할 수 있을 따름이며, 따라서 그 수준이 빚어내는 결과를 감수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점진적으로 더욱 더 향상이 이루어지도록 추구하는 일이야말로 어떤 불교 종파에 속하든 않든 간에 불자를 자칭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 하겠다.


불자가 될 수 있는 권리, 그래서 부처님이 가르치신 ‘삶의 길’을 실천할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중생의 타고난 권리이다. 부모나 승려에 의한 그 어떤 형태의 강요도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누구든지 마음 내킬 때 그 길을 시작할 수 있으며 또한 그 길이 자신의 향상 정도로는 감당하기 버거울 때에는 그만둘 수 있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각자의 정신적 구조를 만들어내는 건축가는 다름 아닌 본인 자신이다. 물론 남에게서 가르침을 구해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그러나 행위를 할 때에는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해야 하며, 그 행위가 빚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도 오로지 그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설혹 승려나 정신적 지도자일지라도 불자의 양심을 지배하고, 조종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 양심의 수준이 아무리 변변치 못해 보일지라도.


불교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사람은, 그 진지성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한, 설령 공부가 아직 미진할지라도 우주의 진정한 본성과 더불어 그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힘과 법칙들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열심히 탐구하는 사람에게 불교는 이 무상하기 짝이 없는 지상의 삶 저 너머로 뻗쳐있는 고원한 세계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줌으로써 인간의 참 존재 의미를 깨닫게 만든다. 잠자고 있는 도덕적 능력들과 기능들을 일깨워 선과 고귀함과 참됨을 향한 욕구에 불을 붙인다. 자연히 그는 자비롭고, 인내심 있고, 비이기적이며, 끈기 있는 사람이 되고자 애쓰게 되며 그 결과, 인생고에 대한 깨달음을, 자신의 궁극적 지향점에 대한 확신을, 모든 생명체가 지향하는 최고의 목표인 해탈, 완성, 열반, 즉 무명이 사라진 경지를 추구할 용기를 얻게 된다. 불교가 이런 작용을 하는 한 진실로 종교라 불리어 마땅할 것이다.


불교는 철학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불교는 신도들에게 신과 같은 창조주나 계시의 말씀을 맹목적으로 믿을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불법의 가르침을 길잡이로 삼아서 있는 그대로 사물을 스스로 탐색, 관찰, 실험한 결과, 얻게 되고 확인하게 되는 개인적 확신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교의 교훈들은 어떤 불가해한 신적 존재의 의지에 바탕을 둔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초자연적인 진리의 계시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권위있는 인물의 선언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진지하게 숙고하기만 하면 그 타당성을 얼마든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이 세상과 인생의 원래 그대로의 구조를 실제경험을 통하여 마음대로 연구 조사하여 진실의 참된 성질에 눈 뜰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진실의 본성을 우리의 삶에 최대한 구현시킴으로써 자신이나 이웃에게 끼치는 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게 된다.


불교는 악행을 한 사람에게 영원한 벌을 내린다고 겁을 주지도 않으며, 내생의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면서 사람을 현혹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미혹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며 과오로 빠져들고 있는 이들의 눈을 밝혀주려고 애쓴다. 불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행위를 추구하는 정직한 수행자로 하여금 보다 높은 정신적 향상과 도덕적 완성에의 길로 이끌어, 마침내 일체의 무상한 것들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인 줄 깨닫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 결과 수행자는 어떤 형태의 복수에 대한 욕구도, 분노에 찬 그 어떤 반항이나 강요 행위도 그리고 게으른 공상도, 이 모두가 사물의 본모습을 깨닫는 일과는 상관이 없을 뿐더러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쓸모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유형의 편견, 착각, 혼란을 찾아내 사실에 입각한 지혜의 빛에 의해 사라지게끔 만든다.


따라서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최상의 종교적․도덕적 원리와 인류가 발견해 낸 가장 심원한 철학적․윤리적 진리를 자신의 실생활 속에서 서로 연관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수행하는 불자의 의무이다. 진정한 불자는 자기 내면에서, 그리고 어디서든 남들과도 조화를 이루어 양쪽 모두에서 흠이 없게 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안으로 흠 없는 것이 밖으로 남들과 조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언제나 잘 알고 있다. 불자의 눈에는 사람은 누구나 각기 다른 재능과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한 형제들이다. 따라서 인종, 피부색, 신조 또는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 불자는 오로지 자신을 개선하여 향상을 이루고자 추구할 뿐이므로, (물론 누군가 도움이나 충고를 구할 경우 기꺼이 돕긴 하겠지만) 남은 물론 나도 해치지 않고 사는 것 말고는 달리 위임된 어떤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


불자는 금생이나 미래의 어느 생에서 ‘잘못 없음13)’ 즉 열반을 성취하기를 원한다. 잘못이 완전히 없게 되었을 때에 마침내 윤회의 삶은 종식된다. 따라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결과로부터 단순히 구원받는 것은 불교의 목표가 아니다. 잘못 없는 삶으로 인도하는 깨달음이 목표다.

그런데 이 깨달음은 결국 개인이라는 기반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누구든 깨달음에 이른 자라면 남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남을 대신해서 깨달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깨달음을 남과 더불어 함께 이룰 수도 없기 때문이다.



법에 눈 뜨게 되는 길


1. 심적, 정신적, 육체적 면에서 정력적인 노력을 통한 길

2. 개인적인 진리의 체험과 실험에 의한 확인을 통한 길

3. 심적, 정서적, 육체적 고난과 시련을 통한 길

4.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한 면밀하고 진지한 조사검토를 통한 길14)

이 모든 길은 개인이 독자적으로 혹은 남의 도움을 받아 답사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행동이 요구될 때마다 그로 인해 빚어질 결과에 대해 그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불자는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해 그 탓을 결코 남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법의 눈을 뜨면 어떻게 변하게 되나(정(正)의 의미)


1. 자아가 영속 불멸하는 영혼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천하는 흐름이라는 것, 그래서 점진적으로 길들일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2. 모든 생명의 상호의존성과 상호연관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 해서 균일화시키거나 일치화시키려 들지 않는다.

3. 생명의 변천­흐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표상현상의 연속에 다름 아니므로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해 무한량의 자애를 베푸는 것을 당연시 하게 된다.

4. 법에 눈 뜬 결과, 선한 과보를 추구하게 되므로 생각과 말과 행동 면에서 계와 지혜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5. 타인을 억누르는 힘보다 자기 내면의 정신력의 개발과 성취가 궁극적 해탈로 나아가기 위한 일차적 목표이다.

6. 언제나, 어디에서나, 가능한 한 모든 고통받는 존재에 대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자비행을 하게 된다.

7. 어떤 절대자에게 기도하거나 간청을 한다 해서 과오의 결과가 면제되기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기꺼이 과오를 인정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혹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여 과오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8. 탐욕, 정욕, 증오, 무지의 불길을 잘 알게 되고 그래서 그것들의 기능이 자신의 삶에서 완전히 소멸(燒滅)될 때까지 신중하게 이들을 피한다.

9. 가치판단을 내림에 있어 진리를 그 기반으로 삼기에, 모든 면에서 진리를 존중하고 추구하게 된다.

10. 독선과 오만함 없이 열반만을 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게 된다.


열반 ― 일체를 포괄하는 진리


열반은 자비심에서 진리를 표현한 말이다.


고귀하게 만드는15) 네 가지 진리[四聖諦]


1. 괴로움[苦]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현존한다.

2. 괴로움은 다스려지지 않은 욕망이 빚은 결과이다.

3.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자기 훈련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4. 그 벗어나는 길은 여덟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고귀하게 만드는 여덟 요소로 된 길


1. 올바른 이해[正見]: 미망을 일소한다.

2. 올바른 열망[正思]: 그 무엇도 해치지 않는다.

3. 올바른 말[正語]: 명확함을 지향한다.

4. 올바른 행위[正業]: 후회할 일이 없어진다.

5. 올바른 생계[正命]: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불명예나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

6. 올바른 노력[正精進]: 선한 결실을 맺는다.

7. 올바른 마음챙김[正念]: 행동을 자제하게 된다.

8. 올바른 명상[正定]: 열반을 준비한다.


깨달음이 행위로 옮겨질 때


자신이나 타인이 해를 입지 않는다.

누구도 양심의 명령을 거스르며 행동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내면의 평화와 안정감이 성취된다.


열 가지 중요한 잘못과 그 근원


1. 살생, 도둑질, 간음 ― 몸

2. 거짓말, 이간어, 욕설, 잡담 ― 혀

3. 탐욕, 증오, 잘못된 생각 ― 뜻


고귀하게 만드는 팔정도를(실패와 의기소침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몸과 혀와 뜻은 점진적으로 잘 제어되어 위에 열거한 잘못들을 줄여나가게 될 것이다.


불자는 위의 열 가지 잘못을 아래와 같이 소극과 적극 양면으로 대응한다.


1. 살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일체의 생명에 대해 존중심을 지닌다.

2. 훔치지 않는다. 빼앗지도 않는다. 선이든 악이든 자기 행위의 결과는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3. 음욕을 삼가며 자제의 삶을 영위한다. 그럼으로써 자기존중을 성취한다.

4.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신중하고 친절한 태도로 진실을 말한다.

5. 나쁜 소문을 꾸며 내지도, 남이 만든 소문을 옮기지도 않는다. 모든 인연 닿는 사람에게서 좋은 점을 찾는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껏 그들을 남들의 비방으로부터 보호한다.

6. 어떤 상황에서도 욕설을 하지 않는다. 예의를 지키며 품위 있게 말한다.

7. 잡담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요점을 말한다. 아니면 침묵을 지킨다.

8. 남의 것을 탐내지도 시샘하지도 않는다. 괴로움이 다반사인 이 세상에서 모처럼 남들이 선을 향유하는 것을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9. 자기 마음에서 악의를 씻어내며 성내지 않는 마음을 귀히 가꾼다. 자신을 해코지 하려 애쓰는 사람에게도 증오심을 품지 않는다. 악을 행하는 자는 나쁜 업보를 면하지 못할 테지만 자기는 이미 피하고 있으니까.

10. 자신의 마음에서 무지를 걷어낸다. 그리고 부처님이 가르치신 대로 선하고 가치 있는 삶으로 이끌어주는 일체사에서 진실을 알고자 탐구한다.


완전을 위한 네 가지 노력


1.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잘못을 미리 예방하는 노력. 단 도를 넘는 일은 없이.

2. 이미 일어난 잘못을 제거하려는 노력. 단 적의를 품는 일은 없이.

3. 이미 알고 있는 진실에 대해 그 앎을 더욱 심화시키려는 노력. 단 근면함에 의해.

4. 아직 알지 못하는 진실을 드러나게 만들려는 노력. 단 정념(正念)에 의해.

  이 정진 바라밀은 혼자서 할 수도 있고 뜻이 맞는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서 해나갈 수도 있다. 신념을 갖지 못한 채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근(五根)의 개발


1. 각 개인의 자발적인 법의 수행[확신].  누구도 남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순 없으니까.

2. 줄기찬 지속적 노력[정진].  부처님의 안내에 따른 노력이면 틀림없이 성공한다.

3. 행위에 대한 주의 깊은 분별[마음챙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를 수도 있는 잘못을 예방하기 위해.

4. 불자로서 당면한 목적에 마음을 집중한다[선정].  어떤 노력이든 좋은 결실을 맺으려면.

5. 자신의 실제 경험을 부처님의 지침에 비추어 분석해서 추려낸 지혜[지혜].  반드시 불교 지침에 비추어 분별된 것이어야 한다. 이 지혜가 없이는 열반에 들 수 없다.


이상의 다섯 선근은 ‘도덕적인 힘’이므로 각 개인이 스스로 주의 깊게 개발하고 계속적으로 실천 수행해야 한다. 이 다섯 가지는 남이, 그가 아무리 그 방면에서 득력을 한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불어넣어 줄 수 없다. 또 이들 근(根)은 언제 어떤 환경에서도 항시 북돋우고 키워줘야 한다.



불자의 생활방식


침묵 속에 얼마나 큰 평화가 있는지를 잊지 않고 소란하고 바쁜 일상 가운데서 조용히 생활한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낸다.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다만 진실을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조용히, 분명히, 뽐내지 않고 자만하지 않는 가운데 말한다.

목청 높이고, 생각이 얕고 공격적인 사람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한다. 그들은 어디서나 말썽을 일으켜 정신을 괴롭히기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허영심이나 비참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도 초라한 사람도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한다. 인과의 법칙이 작용하는데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직업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흥미를 가짐으로써 계획과 성취를 즐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확실하고 무상하기 짝이 없는 이 인생살이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길흉을 모두 받아들인다. 모두가 다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러나 그 누구도 동료에게 다가오는 흉을 막아줄 수는 없음을 명심한다. 향상을 이룬 자는 남을 도와주게 되기를 바라겠지만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려 들지는 않지 않겠는가.


어떤 직업상의 일에도 항상 조심하고 지혜롭게 대처한다. 말썽 일으키기를 일삼는 불성실한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있는 좋은 점마저 못 볼 정도로 자신의 눈을 가리지는 않는다. 메마른 사막에도 샘이 솟듯 좋은 점도 반드시 거기에 있게 마련이니까.

모든 거래에서 타인의 친절과 호의를 발견하려 애쓴다. 그렇지 않으면 남을 못 믿는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 온갖 환멸감 속에서도 친절과 호의는 여전히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정직을 위주로 한다. 호의를 가진 척하지 않고 아는 척 하지 않는다. 가식 놀음은 자라고 또 자라는 암과 같은 것이기에.

자신이나 동료에 관해 부정적인 상상을 하면서 불안해하지 않는다. 의심과 절망이 생길 수 있으니까.

삶 전체를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비로소 정신의 평온이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삶이 고단해질 뿐이니까.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항상 온당하게 마음 쓴다. 그리하여 인생의 고난에 대한 이해를 더 심화시키고, 그럼으로써 그 고난이 진실과 선이라는 목적에 이바지하게 되도록 만든다.

자신과 타인 모두 여기에 존재할 권리가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별이든, 나무든, 짐승이든 혹은 사람이든 그 모두가 그들 자신의 법칙과 업의 형태에 따라 있는 것이지, 자리를 잘못 잡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보편적인 진리로써 마음을 달랜다.


인생이 펼쳐내는 온갖 상황을 선하고 쓸모있는 행위를 할 기회로 살려낸다. 그래서 인생이 친절로 가득 찬 채 제대로 전개되어 나가게끔 돕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가능한 모든 친절을 표하도록 노력한다. 그리하면 자비와 지혜가 자라게 되니까.

세월이 베풀어주는 조언을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개발한다. 젊음 특유의 속성과 흥분을 깨끗이 버릴 줄 안다. 그럼으로써 젊음이 요구하는 바를 더 훌륭히 충족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소란스러운 주변의 혼란에 개의치 않고 자기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 일을 으뜸으로 삼는다. 인생은 힘든 일 투성인 데다 모순 투성이로까지 비쳐지지만 실제로는 충족의 삶을 실현시킬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으니까.

그것이 속임수, 고역, 깨어진 꿈, 사라진 희망으로 가득 찬 인생이든 아니면 성공, 명성, 부, 영광으로 가득 찬 인생이든 어떤 인생을 경험할지라도 그 각각의 인생은 본바탕부터가 바로 그 개인이 만든 그대로인 것이지 달리 다른 것일 수 없음을 항상 마음에 새겨둔다. 인생이 곤경에 빠지거나 세속적인 성공을 이루거나 간에, 그와는 상관없이 훌륭히 잘 사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진리, 행복, 평화를 추구하여 자기 향상을 도모하는 이는 남이 자기 개인의 주도권을 앗아갈 수 없음을 명심한다. 이 권리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포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아무리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결코 그에게서 이 권리를 강제로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고 기운을 내어 진리의 추구를 계속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길을 걸으려는 모든 인간 존재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생래의 권리이다.


불자는 삶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불자는 다음 사항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자 노력한다.

1. 어떠한 생명도 영원하지 않다. 마음과 물질의 상태는 모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당황하지 않는다.

2. 모든 현상은 무상하므로 허영과 오만은 무의미하다.

3. 모든 현상은 인과에 따른 결과이므로 나쁜 인(因)을 짓지 않도록 잠시도 빈틈없이 마음을 챙기는 가운데 주의해서 행동한다.

4. 정신적 향상은 업의 형태에 크게 달려 있다. 업의 형태는 남들의 도움 여부와 관계없이 언제나 그 자신 스스로 수정할 수 있다.

5.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서는 필요할 경우 집단으로든 개인으로든 품위 있게 또 확고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단 차분한 가운데 선의와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다.

6. 삶이 변화를 요구하는 도전인가 아니면 무거운 짐일 뿐인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이 어떤 관점으로 삶을 대하는가의 문제이지 환경이나 타인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다.

7. 괴로움은 항상 존재한다. 괴로움은 산만한 자, 조심성 없는 자, 오만한 자, 악한 자, 어리석은 자에 의해 점점 더 커진다. 반면 분명하게 마음을 챙기는 자, 양심적인 자, 겸손히 선한 자, 지혜로운 자에 의해 최소한까지 줄어든다.

8. ‘정당한’ 성냄조차도 부처님의 길을 따르려는 자에게는 장애가 된다.

9. 과거나 미래를 지향하면 삶은 실제적일 수 없다. 항상 변화하여 마지않는 현재, 그 속에서 삶은 영위되어야 한다. 궁극의 목적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기회로 모든 현재 순간을 활용하면서.

10. 의례의식을 지키는 것으로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범한 잘못된 업의 과보로부터 풀려날 수 없다. 잘못을 범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연히 자비와 지혜의 손길을 뻗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떤 신도 인간도 ‘죄의 사함’을 허가해 줄 수 없다. 또 고행이나 회개를 열심히 한다 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도 아니다.

11. 미혹된 생각이 모든 잘못과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헛된 후회를 거두고 사실대로 현실을 받아들이어 그 근원을 밝혀나가면 미혹은 제거된다. 잘못을 시정하는 길은 사실을 검토하고 진실과 선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길뿐이다.

12. 한 개인이 삶의 무대를 어떤 수준에서 설정하든 간에 제대로 효율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면밀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자세로 임하는 사람은 열반이라는 목표를 성취하는 데도 순탄하여 애로를 겪지 않을 것이다.

아이. 비. 호너 Isaline Blew Horner (1896-1981)

영국에서 출생. 켐브리지 대학에서 1917년 학사학위 받은 후 도서관 근무, 1934년 석사학위 취득. 1921-1923년 인도, 세일론, 버마 여행 중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됨. 1942-1959년 PTS 명예 간사, 1959-1981년 PTS 회장 및 명예 재정위원장 등을 역임.

『율장』,『중부경,『밀린다왕문경』등을 영역(英譯).   『부처님이 세운 법의 도시』(보리수잎 42, 2004, 고요한소리, 『The Blessed One's City of Dhamma』BL130, BPS)가 출간되어 있다.


시따 파울릭 뿔레 - 렌프류 Sita Paulick Pulle-Renfrew

스리랑카의 여성불교학자로,『The Buddhist Way of Life』,The Light of the Dhamma』,A Buddhist guide for laymen』등의 저자.


1) [역주] 웨삭 축제 : 남방에서는 웨삭월(양력 4~5월에 걸친 달 Vesākha) 보름날을 부처님의 탄신ㆍ성도열반의 날로 기리며 그 다음달(양력 5~6월 Jeṭṭha) 보름날까지 여러 행사를 벌이며 이를 축하한다. 6~7월(Āsāḷha)의 보름날은 초전법륜을 행하신 날로 기념하고 있으며 또한 이날은 출가일로도 알려져 있다.


2) 출전『법구경』122게


3) [역주]  불교 초기 경전에서는 과거 7불을 얘기한다. 석가모니불이 그 중 일곱 번째이고, 미륵불은 다음 세의 미래불이다. 팔정도는 모든 과거불들이 가르치셨던 길이다.


4) 출전『숫따니빠따』


5) [역주]  오온 : 영어 원문은 psycho-physical congeries〔정신-물리적 집적(集積)〕. 이는 ‘명색(名色)’ 아니면 ‘명신(名身)․색신(色身)’으로 옮기는 편이 더 직역이 되겠으나, 명(名)에 식(識)이 포함되느냐 여부는 논의의 여지가 있으므로 오온으로 옮긴다. 남방에서는 오온과 명색이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6) [역주]  앞에서 ‘목표에의 도달이 지금 여기서도 가능하다’고 한 것과 상치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우리 모두가 수많은 전생에 걸쳐 수행을 해 왔으며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7) [역주]  보살 : 菩薩,  Bodhisatta. 남방전통에서는 부처가 될 원을 세우고 정진하는 이로서 깨닫기 이전까지를 보살이라 일컫는다. 깨달음[보리 bodhi]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빠알리경에서는 깨닫기 전의 고타마 붓다를 지칭하는 용어로 주로 쓰인다.


8) 출전『법구경』239게


9) 출전 『법구경』「불방일」편 첫번째 게송, 제21게.


10) [역주]  리스 데이비즈 : 영국의 빠알리 학자로 PTS를 창립, 초기불교 연구에 막중한 기여를 했음. (법륜 1『부처님, 그분』, 2005. 주석 3번 참조.)


11) [역주]  본생담 538번째 이야기.


12) [역주]  통상적으로 빠알리경을 꼽아보면 27권이 된다.(율장 1권, 경장은 장부․중부․상응부․증지부 각 1권, 소부 15권, 논장 7권 ― 소부와 논장의 경 이름은, 보리수잎 일곱 『미래의 종교, 불교』주2) 참고.) 그런데 소부경 중 소송경은 독자적 내용이 없이 다른 경전들로부터 추려낸 내용들만 싣고 있기 때문에 빠알리경을 모두 읽는 데에는 포함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보아 저자가 제외시켜서 모두를 26권으로 셈한 것 같다. 첨언하자면 장부 및 중부 송출자(誦出者)들은 소부를 14경으로 꼽고 소송경을 제외시킨다.(Oskar Von. Hinüber, 『A handbook of pāli literature』,  43쪽)


13) 잘못 없음 : ‘잘못 없음(errorlessness)’이라는 말로 필자가 의미한 것은 무지와 미혹으로부터 자유이다. 다시 이것은 완전한 깨달음, 팔정도의 완벽한 수행, 열반의 증득과 같은 뜻이다. 실제로 열반을 ‘잘못 없는 상태’(asammosa dhamma)라고도 불러왔다.― 원 편집자


14) [역주]  이 문단의 내용은 순서를 바꾸어 3을 제일 앞으로 내면 37조도품(助道品) 중의 4여의족(如意足)과 비슷해진다. 4여의족(如意足)은 1. 욕[chanda]여의족, 2. 정진[viriya]여의족, 3. 심[citta]여의족, 4. 관 또는 사유[vimaṁsa]여의족이다.


15) [역주]  보통 ‘사성제’를 영어로 ‘the Four Noble Truths’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저자는 강조하기 위해 ‘Noble’대신에 ‘Ennobling’을 쓰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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