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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oble Eightfold Path

Way to the End of Suffering



팔정도

聖八支道



Bhikkhu Bodhi

|전병재 옮김



The Wheel Publication No. 308-311 1984

Second edition(revised) 1994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Sri Lanka


* 이 책에 나오는 경(經)의 출전은 영국빠알리성전협회(PTS)에서 간행한 로마자 본 빠알리경임.

* 로마자 빠알리어는 이탤릭체로 표기함.

* 각주는 원주(原註)이며, 역자주는 [역주]로 표기함.

* 이 역서는 개정되어 나온 단행본(1994)을 저본으로 했기 때문에 Wheel series (No. 308-311 1984)로 나온 텍스트와는 상이한 부분이 다소 있음.














차례

 


시작하는 말 6


Ⅰ ‘고’가 끝나는 길 11

Ⅱ 바른 견해 35

Ⅲ 바른 의도 63

Ⅳ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91

V  바른 노력 125

Ⅵ 바른 마음챙김 150

Ⅶ 바른 집중 184

Ⅷ 지혜의 계발 207


맺는말 231


 저자소개 233

 부록 1: 팔정도의 요소별 분석 234

 부록 2: 추천 도서 목록 238










시작하는 말


부처님 가르침은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의 두 핵심 원리로 요약될 수 있다. 사성제는 교의(敎義)에 해당하며 교의는 무엇보다도 이해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이와는 달리 팔정도는 실천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넓은 의미의 율(vinaya)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의 구성 체계 안에서는 이 두 원리가 하나의 불가분의 통일체로 맞물려 있는데 우리는 이를 법­율(Dhamma­vinaya), 또는 줄여서 법(Dhamma)이라 부른다.1) 사성제의 마지막인 도성제(道聖諦)가 곧 팔정도이고 또 도성제, 즉 팔정도의 첫 항목이 사성제에 대한 바른 이해인 정견(正見)이라는 사실은 불법의  내적 통일성을 잘 보여 준다. 요컨대 사성제의 체계 속에 팔정도가 들어 있고 팔정도는 다시 사성제를 수렴하는 식으로 이 두 원리가 서로 삼투(?透)하여 각기 상대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맞물려서 하나의 통합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큰 가치를 지니는가, 즉 교의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실천도(實踐道)가 더 중요한가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굳이 물어온다면 답은 도(道)라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도이기 때문이다. 도는, 자칫 추상적 교리를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 되기 쉬운 법[Dhamma]을 진리의 지속적인 시현(示顯)이 되도록 살려낸다.

팔정도는, 부처님께서 당신 가르침의 서두로 삼으신 ‘고’에서 벗어나는 출구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팔정도는 부처님 가르침의 목표인 ‘고(苦)로부터의 해탈’이 우리의 경험세계 속에서 접근 가능한 것이 되도록 해준다. 그럴 때에만 해탈은 비로소 실다운 의미를 띠게 된다.


팔지성도(八支聖道), 즉 팔정도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앎의 문제가 아닌 실천의 문제다. 그러나 팔지성도를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 자체가 바로 실천의 주요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바른 이해’야말로 팔정도의 여타 항목을 이끄는 선도자이자 길잡이 구실을 하는 첫 번째 항목으로서의 정견(正見)의 진면목인 것이다.

열정에 들뜬 초심자에게 지적 이해라는 과제는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성가신 일이어서 뒤로 미루어두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우리의 수행이 궁극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바른 이해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자는 팔정도의 여덟 항목과 그 각각의 구성 요소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팔정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필자는 도(道)의 항목들을 설명함에 있어 부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 다시 말해 빠알리 경장에 나오는 말씀들을 주축으로 하여 되도록이면 간결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경전을 접하기 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이미 고전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냐나띨로까 스님의 《붓다의 말씀》2)이라는 단행본에 담긴 부처님 말씀을 주로 인용했다. 그러나 그 인용구들 중에는 필자의 생각대로 조금씩 고친 경우도 없지 않다. 때로는 의미를 부연 설명하기 위해 주석서를 인용하기도 했다. 특히 제 7장과 8장에서 ‘집중’과 ‘지혜’를 필자 나름으로 설명할 때에는 5세기경 붓다고사 스님이 저술한 《청정도론》3)에 크게 의지했는데 이 책은 도의 실천 체계를 자세히, 그러면서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방대한 백과사전적 저작이다.

여기에서는 지면 관계상 각 항목을 속속들이 다루지는 못했다. 이런 결함을 보완하는 뜻에서 책 말미에 독자를 위한 추천 도서 목록을 실었다. 그 책들을 통해서 팔정도 항목 하나하나에 대해 더 상세한 설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實)수행에 전념할 경우, 특히 정(定)?혜(慧) 공부를 본격적으로 닦으려 할 때에는 책임 있는 지도를 해 줄 수 있는 스승과의 만남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

      

                              비구 보디

I  ‘고’가 끝나는 길

고통을 겪다 보면 그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길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그 길은 빛이나 황홀경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고뇌, 실망, 혼란 등의 세찬 역풍 속에서 비틀거리며 시작된다. 한편 참된 정신적 탐색을 낳을 수 있는 고(苦)는 외부로부터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고통 이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러한 고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빠져드는 안이한 타성을 꿰뚫고, 저 밑바닥에 계속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위험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는 내면적 각성을 촉발시키는 것이어야만 한다.

비록 순간일지라도 이런 통찰을 하게 되면 그것은 개인의 삶을 중대한 변환국면으로 몰아갈 수 있다. 즉, 이런 통찰경험을 한 번만이라도 겪게 되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삶의 목표와 가치관을 뒤집어엎어버리고, 습관적으로 열중해왔던 일들도 하찮게 여기며, 지금껏 즐겁기만 했던 일들이 불만스러워 다시는 돌아보지 않게 된다.


처음에는 이러한 변화가 대체로 달갑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통찰경험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비전을 굳이 거부하려 하고, 뻔한 사실을 놓고 쓸데없는 의심을 일삼고 있다고 생각하려 든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일을 추구함으로써 당면한 불만을 외면하려 애쓴다. 그러나 탐구의 불길은 일단 점화되기만 하면 계속 타기 마련이다. 우리가 수박 겉핥기식의 자기개선에 몸을 내맡기거나, 낙관적 견해에 빠져들지 않는 한, 처음에는 미미했던 통찰의 불씨가 세찬 불길로 타오르고 우리는 다시 고통의 본질에 직면하게 된다. 빠져나갈 길이 모두 막혀 버린 바로 그 때 우리는 비로소 불안한 상태를 끝낼 수 있는 방도를 찾아 나서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감각적 쾌락을 갈구하거나, 기성의 지배적 사회규범의 압력에 떠밀려 표류하는 인생을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더 깊은 진실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우리는 한층 안정된, 진정한 행복의 소리를 이미 들었다. 이제 우리는 그 행복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편안히 앉아 쉴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새로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일단 이러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하고 거기에 필요한 가르침을 찾다보면 너무나 다양하고 서로 다른 교시들이 널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금의 정신적 유산을 쌓아놓은 서가에는 제각기 가장 높은 경지의, 가장 빠르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심오한 길임을 자처하는 수많은 정신적 가르침과 수련 방식들이 시장 바닥의 상품들처럼 즐비하게 펼쳐져 있다. 구경(究竟)의 경지를 향한 우리들의 탐구를 위해 필요한 지식들이 단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다른 수많은 가르침들 속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과연 어느 쪽이 진실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인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해결책인지, 또 어느 길이못된 곁길인지를 올바로 판단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요즘 인기 있는 해결책 중 하나는 절충식 접근 방식이다. 여러 전통에서 편리한 대로 취사선택하여 자기 입맛에 맞게 꿰어 맞추는 것이다. 불교의 마음챙김 명상법을 힌두교의 만트라 암송과 조합할 수도 있고, 기독교의 기도를 수피즘의 춤과, 유태교의 카발라를 티베트 불교의 심상(心像)수련과 결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절충주의는 우선 아쉬운 대로 세속의 물질주의로부터 벗어나 정신적인 삶의 색조를 띠게 하는 데는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그런 색깔은 얼마 못가서 바래게 마련이다. 절충주의는 잠시 쉴만한 길가 주막집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종착점까지 타고 갈 수 있는 믿음직한 수레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절충주의가 안고 있는, 서로 맞물린 두 가지 결함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절충주의가 끌어대고 있는 전통들 각각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이다. 삶의 질이 손쉽게 고양되기를 원한 나머지 위대한 여러 가지 전통들이 제시해 놓은 수행법들을 제멋대로 오려내고 붙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만한 성과가 나올 수 없다. 그 까닭은, 위대한 정신적 전통일수록 그것이 제시해 놓은 수행법들은 각각의 독립된 기법들을 단순히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전체로서만이 완전체가 되는 그런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실재의 본질과 정신적 탐구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수미일관한 통찰의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무릇 정신적 전통이란 발을 살짝 담갔다가 쉽게 뺄 수 있는 얕은 개울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강물 같아서 우리 삶의 마당을 온통 덮쳐 버릴 수 있다. 우리가 그 강을 타고 여행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배를 띄워 깊은 곳까지 나아갈 만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절충주의가 갖는 두 번째 결함은 첫 번째 결함으로부터 나온다. 원래 정신적 수행 체계들은 각기 제 나름의 진리관과 궁극적 선(善)에 대한 인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상보관계를 이룰 수 없게 되어 있다. 실제로 이러한 전통들의 가르침을 꼼꼼히 검토해 보면 각기 세상 보는 눈에서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차이들 단순히 동일한 내용에 대한 표현상의 차이라고 손쉽게 간주해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 차이들은 최고의 목표와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 걸어야 하는 길이 보여 줄 매우 상이한 경험들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상이한 정신적 전통들이 제시하는 시각과 수행법들이 본원적으로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절충주의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어느 한 길을 택하여 진지하게 전념해 볼 태세가 갖추어지면 또 다른 중대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과연 어떤 길이 참된 깨달음과 해방으로 이끌어 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난제의 해결을 위한 한 가지 지침은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자문자답해 보는 일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자유 그 자체인가, 아니면 자유로워져서 무엇을 해보겠다는 것인가, 그러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신중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고’의 종결에 이르는 길을 찾는 일이다. 결국 그 모두가 고의 문제로 귀착된다. 따라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 고를 ‘철저히’, ‘최종적으로’ 끝장내는 길이다. 여기서 이 두 수식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길은 모든 고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끝낸다는 의미에서 ‘철저한’ 것이어야 하고 또 어떤 고이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최종적인’ 것이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당위의 문제라면, 실제로 고를 철저하게, 최종적으로 끝장내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점은 이와는 별개의 현실 문제로 다가온다. 우리가 어떤 길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 전에는 그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확인방법은 없다. 어떤 길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 위해서는 그 길의 효험에 대한 충분한 신뢰가 필요하다. 정신적인 길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것은 새 옷을 고르는 것과 같을 수 없다. 새 옷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옷을 거울 앞에서 직접 입어보고 그 중 가장 보기 좋은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정신적인 길의 선택은 오히려 결혼하는 일에 더 가깝다. 평생을 함께 살아갈 배우자를 구할 때에는 누구나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믿음직하고 한결같은 반려자와 만나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를 안내해 줄 길이란 어디에도 없으니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따라가 보거나 아니면 동전을 던져 점이라도 쳐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선택을 할 때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맹목적이고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도 유용한 지침은 있기 마련이다. 정신적인 길은 대체로 총합적 가르침의 틀을 갖추어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의 틀을 잘 검토해 보면 그 틀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길이 과연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이런 문제를 검토할 때에는 다음 세 가지를 평가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첫 번째 기준은 그 가르침이 고(苦)의 범위에 대해 충분하고도 정확한 그림을 제시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 가르침이 제시하는 고의 그림이 불완전하거나 결함이 있으면, 그런 가르침이 제시하는 길 또한 흠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마련해 주지 못할 것이다. 환자에게 자신의 병에 대해 충분하고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고’로부터의 해방을 구하는 우리에게도 갖가지 고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 대해 믿음이 가는 설명을 해주는 가르침이 필요하다.


두 번째 기준은 고를 일으키는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외적 증상을 개괄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드러난 증상 아래 깔려있는 근본 원인까지 꿰뚫어보고 그 원인들을 정확하게 설명해주어야 한다. 어떤 가르침이 원인분석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다면 그 치료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세 번째 기준은 치료 처방, 즉 길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 어떤 가르침이든 그것이 제시하는 길은 반드시 고를 근원적으로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길은 고의 원인부터 제거함으로써 고를 완전히 종식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 길이 고의 문제를 근본적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궁극적 의미에서 그 길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런 의 가르침은 병의 증상을 가시게 함으로써 병이 완전히 치료된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뿌리가 속에서 계속 자라는 치명적 병에 걸린 사람이 겉으로 성형수술이나 받고 만족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고를 종식하는 참된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라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제대로 갖춘 것이어야 한다. 첫째 고의 범위와 깊이에 대해 완전하고도 정확한 그림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둘째 고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내놓아야 하며, 셋째 고의 원인을 뿌리째 뽑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 글은 세상의 온갖 수행법들을 이 세 가지 기준에 비추어 일일이 따져보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Dhamma)과 법이 고의 문제에 대해 제시하는 해결책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이 갖추고 있는 본연의 성질, 즉 사물의 시종을 설명하면서 덮어놓고 믿음을 강요하는 식의 종교적 교의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고’로부터의 해방을 경험을 통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전언(傳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전언은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를 실제로 종식할 수 있는 길을 구체적인 수행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길이 바로 성팔지도(聖八支道 ariya a??ha?gika magga)이다. 이 성팔지도, 즉 팔정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심장이나 다를 바 없다. 팔정도를 발견함으로써 부처님의 깨달음이 개인적인 깨달음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 의미를 띠게 되었고 그래서 그분은 일개 현자나 자비로운 성자의 지위를 넘어 ‘세상의 스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제자들의 눈에 비친 그분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다.


일찍이 생긴 적이 없었던 길을 생기게 하신 분, 일찍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길을 만드신 분, 일찍이 선포된 적이 없었던 길을 선포하신 분, 길을 아시는 분, 길을 보시는 분, 길을 안내하시는 분. (《중부》108경)


그분 자신도 다음과 같은 말로 구도자들을 고무하고 그들에게 약속하신다.


그대 자신이 분발해야 한다. 모든 부처는 단지 길을 가르치는 스승일 뿐이다. 이 길을 나아가는 선(禪)수행자들은 악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법구경》276게)

 

팔정도가 과연 해탈로 안내하는 확실한 길인지 점검하기 위해 우리는 앞서 언급한 세 기준에 비추어 부처님께서 고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는지, 또 그 원인을 어떻게 분석하는지, 그 치료책으로 어떤 처방을 제시하는지를 검토해 보는 것이 좋겠다.



‘고’의 범위


부처님은 고의 문제를 슬쩍 건드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당신 가르침의 초석으로 삼으신다. 그분은 당신 가르침의 요약인 사성제의 첫머리에서 우리의 삶이 고(苦 dukkha)라고 부르는 것과 결코 분리될 수 없게 묶여 있다[生卽苦]고 선언하셨다. 

빠알리어 ‘둑카’는 흔히 ‘고통(suffering)’이라고 번역되고 있으나 이는 통상적으로 느끼는 아픔이나 고통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뜻한다. 이 말은 깨달음에 이른 아라한들을 제외한 모든 중생의 삶을 관류하는 근본적 불만족성을 일컫는 것이다. 이 근본적 불만족이 때로는 슬픔, 비탄, 실망, 절망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은 사물이 완전해지는 일은 결코 없다거나, 우리가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으로 기대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등의,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모호한 것,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일종의 느낌으로서 우리 알아차림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는 그러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고’야말로 참다운 정신적 문제로서 유일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밖의 다른 문제들 - 수세기에 걸쳐 종교적 사색가들을 우롱해 온 신학적, 형이상학적 문제 같은 것들 - 은 ‘자유로워지도록 돕는 것이 못된다’해서 조용히 옆으로 젖혀두신다. 부처님은 당신이 가르치는 것은 ‘고’와 ‘고의 종식’, 다시 말해 둑카[dukkha 苦]와 둑카의 멸(滅)일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부처님은 고를 개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가 취하는 다양한 모습을, 분명한 것은 분명한 대로 미묘한 것은 미묘한 대로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비근한 고, 즉 생명 그 자체의 생체적 과정에 내재한 고로부터 시작하신다. 고는 태어나고 늙고 죽는 일에서, 병들기 쉽고 사고당하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일들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드러난다. 또 고는 가슴 아픈 이별, 불쾌한 만남,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함 등에서 비롯되는 노여움, 슬픔, 좌절, 두려움으로 드러난다. 심지어는 즐거움조차도 고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다. 즐거움은 그것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행복을 안겨주지만 그런 즐거움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즐거움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아쉬움뿐이다.

우리들의 삶은 대부분 쾌락의 목마름과 고통의 두려움 사이를 오가고 있다. 즐거움을 좇거나 고통을 피해서 하루하루를 허둥대며 살다보면 만족스러운 평화는 거의 누리지 못하고 만다. 진정한 만족은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지평선 저 너머 멀리 있는 것으로만 보일 뿐이다. 그러다가 평생 쌓아올린 자기 존재도 포기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뒤로 한 채 결국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죽음마저도 우리를 고의 종말로 데려다주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생의 흐름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이 한 곳에서 한 육체와의 인연을 끝맺음할 때 ‘식(識)의 연속’, 즉 ‘의식의 흐름’은 어디선가 새로운 육신을 물질적 바탕으로 삼아 다시 이어진다. 이처럼 삶의 순환은 존재의 상태를 계속 누리려는 욕구, 즉 갈애에 추동되어 거듭거듭 생?노?사를 이어나간다.

부처님이 윤회(sa?s?ra), ‘헤맴’이라고 부른 이 재생의 사이클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대를 줄곧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계속 이어간다. 이 과정은 첫 공간적 출발점도 시간적 기원(紀元)도 없다.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우리는 항상 삶을 영위하고 있는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의 전생(前生)으로서, 한 존재 상태에서 다른 존재 상태로 방랑하고 있는 모습이다. 부처님께서는 지옥계, 축생계, 인간계, 천상계 등 재생이 이루어지는 다양한 세계를 그려 보여 주셨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최후의 안식처는 아니다. 이 중 어느 차원의 세계에서도 삶이 있는 한 죽음을 피하지는 못한다. 그만큼 삶은 무상한 것이고 따라서 가장 깊은 의미의(苦 dukkha)인 불안정성이라는 특징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고의 완벽한 종말을 열망하는 사람은 세속적 성취나 삼계(三界)에서의 어떠한 위치에도 만족해서 머무를 수 없다. 고의 최종적 종말은 오직 불안정성의 소용돌이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의 원인


이미 말했듯이 고를 끝장내는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라면 그것은 고가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는지를 믿음이 가도록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고를 멈추기 위해서는 고가 시작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고를 그 원인과 함께 멸해야 한다. 이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과연 무엇이며 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철저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고의 생겨남[生起]에 관한 진리[集聖諦]’를 밝히는 데 부처님은 당신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셨다. 그 발단이 우리 마음 안에 있다는 것, 즉 우리 존재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마음을 어지럽히고 남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 해치는 근본적 질병으로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주셨다. 이 질병의 징후는 정신적으로 불건전한 상태에 빠져들기 쉬운 우리 기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불건전한 상태는 빠알리어로 ‘낄레사(kilesa)’라 하고 보통 번뇌(煩惱), 또는 정신적 오염원이라고 번역된다. 번뇌의 가장 깊은 뿌리는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이다. 탐욕(貪欲 lobha)은 자기중심적 욕구이다. 즉, 쾌락과 소유를 향한 욕심, 생존의 욕구, 권력ㆍ지위ㆍ명예를 통해서 자긍심을 굳건히 하고자 하는 욕구 등이 그것이다. 진에(瞋? dosa)는 부정적 반응을 뜻하는 것으로 거부, 짜증, 저주, 미움, 적개심, 분노, 폭력 등의 형태로 드러난다. 치암(癡暗 moha)은 정신적 어둠을 뜻한다. 즉, 명료한 이해를 차단하는 무감각의 두터운 덮개를 가리킨다.


이 세 뿌리로부터 자만, 질투, 야심, 무기력, 오만 그 밖에도 각양각색의 다른 번뇌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모든 번뇌가 아우러져 뿌리와 가지를 이루면서 다양한 형태로 고를 빚어낸다. 고통과 슬픔으로, 공포와 불만으로, 생사를 되풀이하는 지향 없는 표류의 형태로. 따라서 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번뇌들부터 없애야 한다. 하지만, 이들 번뇌의 제거는 아주 체계적으로 도모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다. 이 일은 없애야겠다는 의지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없어졌으면 하는 소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일에는 철저한 탐구와 분석이 필요하다. 번뇌가 무엇에 의지하는지부터 알아내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 의지하는 것들의 뒷받침을 제거해내는 것이 우리들의 능력으로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를 규명해 내어야 한다.

    

부처님은 다른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하나의 번뇌, 모든 번뇌를 자리 잡게 하는 하나의 뿌리가 있다고 가르치신다. 이 뿌리가 무명(無明 avijj?)이다.4) 무명은 단순한 지식의 부재, 특정 정보에 대한 앎의 결여가 아니다. 세부적 지식을 아무리 많이 축적해도 무명은 여전히 건재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럴수록 더 무섭게 약삭빨라지고 빈틈없게 된다. 고의 근원적 뿌리라 할 때의 무명은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근본적 어둠을 말한다. 어떤 때는 무명은 단순히 올바른 이해를 흐리게 만드는 소극적 태도를 연출하다가 어떤 때는 적극적인 역할을 떠맡고 나온다. 큰 사기꾼이 되어 수없이 왜곡된 지각(perceptions)과 개념(conceptions)을 그려낸다. 그러면 마음은 자기 자신의 현혹된 미망이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는 줄은 모르고 그것들을 세상의 속성으로 이해해 버린다.


이렇게 잘못된 지각과 관념들(ideas)이 번뇌를 키우는 토양으로 작용한다. 마음은 즐길 거리가 됨직한 것을 겉만 보고는 애착을 일으켜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버리는데 그 결과가 탐욕[貪]이다. 우리는 기쁨을 얻기를 갈망하지만, 장애가 나타나거나 방해를 받게 되면 성이 나고 반감이 치밀기 십상이다. 혹은 모호성 속에서 허둥대다 보면 어느덧 시야는 흐려지고 마침내 미망[癡]에 빠져들게 된다. 이렇게 간단히 살펴보아도 고를 키우는 터전은 쉽게 발견된다. 무지[無明]는 번뇌로, 번뇌는 고로 둔갑해 버리는 것이다. 이 인과(因果)의 기반이 버티고 있는 한,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감각적 즐거움, 사회적 즐거움, 지적?정서적 즐거움 등 온갖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즐거움을 경험하더라도, 아무리 고통을 잘 피하더라도, ‘고’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존재의 핵심에 그대로 남아 있고 우리는 고의 영역 안에서 계속 맴돌 수밖에 없다.



‘고’의 원인 제거


고로부터 충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고의 뿌리를 뽑아버려야 하는데, 이는 곧 무명(無明)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무명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명의 반대인 명(明)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답은 분명해진다. 무명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명 제거에 필요한 것은 곧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식이다. 단순한 개념적 지식, 관념으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앎’이면서 동시에 ‘봄’이기도 한 지각으로서의 지식이다.

이런 종류의 앎을 지혜[慧 pann?]라고 부른다. 지혜야말로 무명이 범하는 왜곡 작업을 교정하도록 돕는다. 지혜는, 우리 마음이 실재와의 사이에 통상적으로 만들고 있는 관념, 견해, 가정(假定) 등의 장막에 구애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무명(無明) 없애자면 지혜가 필요하다. 그럼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지혜란 사물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확연한 앎이므로 이는 단순히 학습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관련 자료를 수집?축적한다고 해서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혜는 계발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일련의 조건을 갖춤으로써 지혜는 생겨나는데, 이들 조건을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조건들이란 실은 심적 요소들로서 특정 목적지로 뻗어있는 행로, 즉 도정(道程)이라 부를 수 있는 체계적 구조를 이루는 의식의 구성요소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목적지는 고의 종식이고 거기에 이르는 도정은 여덟 항목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팔정도이다. 이 여덟 항목이란 바로 ‘바른 견해[正見]’, ‘바른 의도[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부처님은 이 길을 중도(中道 majjhim? pa?ipad?)라 부르신다. 팔정도를 중도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고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 두 가지 잘못된 시도, 즉 양극단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불만을 해소하려는 시도로, 감각적 쾌락을 극단적으로 탐닉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쾌락을 주지만 그렇게 얻은 쾌락은 허망하고 순간적이어서 결코 깊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부처님은 감각적 욕구가 인간의 마음을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감각적 쾌락에 얼마나 강하게 집착하게 되는지도 속속들이 꿰뚫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또 이런 쾌락이 욕심을 놓아버리는 데서 오는 행복감에 비해서 매우 저급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구경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감각적 쾌락을 끊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되풀이해서 가르치다. 요컨대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행위를 “저열하고, 범속하고, 세속적이고, 고귀하지 않고, 목표에 이를 수 없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다른 하나의 극단적 방법은 고행, 즉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해탈을 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방법은 구원을 얻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이런 고행은 아무 소득 없이 고생만 하게 만드는, 잘못 설정된 가정(假定)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고행 방법은, 문제의 근원이 탐?진?치 삼독에 사로잡힌 마음에 있는데도 애꿎은 육신을 속박의 원인으로 보고 다그치는 데 문제가 있다. 번뇌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육신을 괴롭히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뿐 아니라 해탈을 구하는 데 필요한 도구인 소중한 몸을 훼손하고 쇠약하게 하는 자기 파괴적인 짓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두 번째 극단적인 방법을 “고통스럽고, 고귀하지 않고, 목표에 이를 수 없는” 것이라 말씀하셨다.5)


이 두 가지 극단적 접근방식을 떠난 것이 곧 팔정도이다. 그런데 이를 중도라 한다 해서 양극단을 적당히 타협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이들 각각에 내포되어 있는 잘못을 피하고 그 둘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뜻이다. 팔정도는 욕망의 허망함을 알고 그것을 놓아버리게 하는 데에 초점을 둠으로써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극단을 피한다. 감각적 욕구와 쾌락은 진정한 행복의 수단이기는커녕 오히려 고통의 원천이기 때문에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러나 버리는 수행이라 해서 육신을 괴롭혀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 수련이므로 몸은 이런 내면적 작업에 적합한,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는 잘 보살펴서 건강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한편, 정신적 기능들은 해탈을 위한 지혜를 발생시키도록 훈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팔정도라는 중도로서 ‘눈(cakkhu)을 생겨나게 하고 지(智 n??a)를 생겨나게 하고 평화(upasama)로, 직지(直智 abhinn?)로, 깨달음(sambodhi)으로, 열반(nibb?na)으로 이끄는’ 길이다.6)

Ⅱ 바른 견해[正見 samm? di??hi]


팔정도의 여덟 가지 항목은 하나하나 차례로 밟아 올라가야 하는 계단 같은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비유를 들자면 팔정도는 여러 가닥으로 꼰 밧줄 같은 것으로, 그 밧줄이 최대한 힘을 받기 위해서는 그 모든 가닥 하나하나의 협력이 필요하다. 공부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으면 이 여덟 가지 항목 서로 도우며 동시에 드러난다. 하지만 그 지점에 이를 때까지는 길을 열어나가는 데 어떤 순차를 밟아나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수행에 임하는 입장에서는 팔정도의 여덟 가지 항목들을, (1)‘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가 만드는 도덕적 연마의 묶음[戒蘊], (2)‘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 만드는 집중의 묶음[定蘊], (3)‘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가 만드는 지혜의 묶음[慧蘊] 세 단계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 이렇게 세 가지 묶음으로 분류하고 보면 그 셋은 더 높은 도덕적(moral) 훈련, 더 높은 의식(consciousness)훈련, 더 높은 지혜(wisdom) 훈련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7)


세 가지 훈련의 순서는 도정의 전체적 목적과 방향에 의해서 결정된다. 팔정도가 지향하는 최종적 목적, 즉 고로부터의 해방은 결국 무지[無明]를 발본색원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달렸기 때문에 무지에 정면으로 맞서는 훈련단계야말로 마땅히 이 도정의 극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지혜훈련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지의 기능을 일깨우게 기획된 것이다. 지혜는 물론 점차 열려온다.

그러나 아무리 희미한 수준의 것일지라도 통찰이 섬광을 발하려면 동요와 산만함이 제거되어 집중을 이룬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집중은 도정의 두 번째 묶음인 정(定)의 공부, 즉 지혜의 개발에 필요한 적정(寂靜)과 차분함을 가져오는 한결 높은 식(識)의 공부를 통해 이루어진다. 마음이 집중되어 통일되기 위해서는 평소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선하지 못한 성향들부터 먼저 다스려야 한다. 불선한 여러 성향은 우리의 주의력을 잡다한 관심거리로 분산해버리기 때문이다. 불선한 성향들이 몸과 말을 통해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으로 드러나도록 방치해 두는 한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여섯 가지 기능들[六根]이 번뇌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수행의 초장부터 이들의 활동을 철저히 제어할 필요가 있다. 이 과업은 도덕적 훈련[戒行]이라는 도정의 첫 번째 묶음에 의해 이룰 수 있다. 이와 같이 도정은 집중[定]의 기반으로서의 계(戒), 혜(慧)의 기반으로서의 정(定), 그리고 해탈에 도달하기 위한 직접적 도구로서의 혜(慧), 이 세 단계로 뻗어나간다.


팔정도 항목들의 배열이 삼학(三學)의 계?정?혜 세 묶음의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혼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를 내용으로 하는 지혜가 삼학에서는 마지막 단계이다. 그러나 도정에서는 이 두 요인이 첫머리에 놓여 있다. 성전(聖典)이라면 엄정한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할 터인데 왜 팔정도에서는 이 두 가지가 맨 마지막에 나오지 않고 오히려 서두에 나오는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배열은 조심성 없는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방편상 신중하게 고려한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즉, 예비적 형태의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의도[正思]가 공부 시작 단계에서는 삼학에 들어서도록 유도하는 박차로서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른 견해’는 수행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제공하고, ‘바른 의도’는 수행을 위한 바른 방향 감각을 제공한다. 물론 이 두 가지 이런 예비적 역할만으로 그 임무가 끝난 것은 아니다. 마음이 계와 정의 수련으로 순화되면 더 뛰어난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에 이르게 되고 그때는 더 높은 지혜 공부에 걸맞게 된다.

 

‘바른 견해’는 팔정도 전체를 이끄는 여타 모든 항목의 선도자이다. 바른 견해를 통해 우리는 출발점과 목적지, 그리고 수행이 진행되면서 통과하게 되는 순차적인 이정표들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바른 견해’라는 기반이 없이 수행을 해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무모하게 덤비다가 길을 잃게 될 위험을 무릅쓰는 짓이나 다를 바 없다. 이는 마치 지도를 들여다보거나 경험 있는 운전자의 설명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아무데로나 무턱대고 자동차를 몰고 가려는 경우와 같다. 자동차에 성급하게 올라 출발을 서두르다 보면 갈수록 목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표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버릴 가능성이 크다.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자면 대충이라도 그 방향과 거기로 가는 길에 대한 예비지식을 가져야 한다. 도의 수련과정에 있어서도 이치는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수행은 어디까지나 바른 견해가 만들어주는 이해의 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바른 견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진실이라든가 가치라든가 하는 핵심적 쟁점에 관해 우리 평소에 어떠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가가 어떤 이론적인 확신들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에 비추어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시각은 우리의 태도, 우리의 행위, 삶을 대하는 우리의 방향 감각 전체를 지배한다. 견해라는 것은 애당초 우리 마음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믿는 바를 희미하게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견해가 선명한 것이든 아니든, 말로 표현된 것이든 아니든 그 영향은 지대하다. 견해는 우리의 지각을 특정 체계로 조직화하고,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또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에게 해석해 주는 관념의 틀로 결정화(結晶化)한다.


따라서 이들 견해는 행동의 조건이 된다. 우리가 무엇인가 선택하고 목표로 삼고, 그리고 그 목표를 이상으로부터 현실로 전환하려 노력할 때 그 배후에는 반드시 이들 견해가 도사리고 있다. 행위 자체가 결과를 결정하겠지만 사실은 그 행위 그로 인한 결과는 그들의 원천이 되는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

견해 무엇이 진실이된 것인지에 대한 판단, 즉 ‘존재론적 개입’을 뜻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바른 견해와 바르지 못한 견해의 두 부류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바른 견해는 진실한 것과 상응하는 반면, 바르지 못한 견해는 진실에서 벗어나 거짓이 확하게 자리 잡도록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두 종류의 상반되는 견해가 본질적으로 아주 다른 행동노선으로 치달아 결국 정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가르치신다. 만약 우리가 바르지 못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비록 그 견해가 흐릿한 것일지라도 결국에는 고로 귀결되는 쪽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바른 견해를 채택하면 그 견해는 우리를 바른 행위로 나아가게 할 것이고 그런 행위에 의해서 고로부터의 해방 쪽을 향해 방향타를 조종하게 될 것이다. 비록 이 세계에 대해 우리들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개념화하는 일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해로울 것도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앞으로 전개될 모든 과정을 판가름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도 불건전한 마음상태를 일으키는 데 잘못된 견해만큼 책임이 큰 요인도 없고, 건전한 마음상태를 일으키는 데 바른 견해만큼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 생류(生類)의 고[不善法]를 일으키는 데 잘못된 견해만큼 책임이 큰 것도 없고 생류의 낙[善法]을 증진시키는 데 바른 견해만큼 강력한 것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증지부》1법집 17경)


가장 넓게 보면 바른 견해[正見]는 부처님 가르침 전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범위는 법 그 자체의 범위와 맞먹는다. 그러나 실(實)수행을 위해서는 두 가지 바른 견해가 특히 중요한 것으로 부각된다. 하나는 세속의 굴레 속에서 기능하는 견해, 즉 세속적 정견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으로부터 해탈로 이끄는 수승한 정견, 즉 출세간적 정견이다. 세속적 정견은 육도를 윤회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정신적 향상을 관장하는 법칙으로서 높은 단계 또는 낮은 단계의 생으로 태어나는 원리 및 세속적 고락과 관련된 것이다. 이에 비해서 출세간적 정견은 해탈에 필수적인 원칙들에 관련된 것으로서 우리가 생을 거듭하는 가운데 정신적 향상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할 뿐 아니라 반복되는 생과 사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궁극적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바른 견해


세속적인 바른 견해에는 업의 법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포함된다. 여기서 말하는 업은 물론 행위의 도덕적 효력을 말한다. 이를 다시 정확하게 규정지은 바에 따르면 ‘업의 귀속에 대한 바른 견해(kammassakat? samm?di??hi)’가 되는데 이를 설명하는 표준적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존재는 자기가 지은 업의 주인이자 자기 업의 상속자다. 그들 각자는 자기 업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며 자기 업에 매여 있고 자기 업으로 지탱된다. 선악 간에 어떤 업을 짓든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8)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설명도 경전에 나온다. 예컨대, 남에게 무엇을 주거나 보시를 하는 등의 덕스러운 행위는 도덕적 중요성을 띤다는 것, 선행과 악행은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수반한다는 것, 누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섬길 의무가 있다는 것, 재생이 있으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선 세계가 있다는 것, 또 스스로 체득한 높은 깨달음에 기초해서 법을 설하는 사문이나 브라만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확언하는 경 구절들9)이 있다.

 

이렇게 표현되고 있는 ‘바른 견해’가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열쇠가 되는 용어인 업(業 kamma)이라는 말의 의미부터 먼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업’이라는 용어는 행위를 의미한다. 불교에서 그런 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의욕이 빚는 행위, 그 중에서도 도덕적 측면이 관건이 되는 의욕이라는 의미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의욕이야말로 행위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위와 의욕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데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셨다. 업을 분석하는 한 경에서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내가 업(kamma)이라 부르는 것은 의욕[思 cetan?]10)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의욕이 생겼기에 사람은 몸[身], 말[口], 뜻[意]으로 업을 짓는다.”11)고 언명하셨다. 업을 의욕 내지 의지작용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결국 업을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마음의 욕구?성향?목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정신적인 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의욕은 몸이나 말, 또는 뜻[意]의 세 가지 통로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이 셋을 세 가지 ‘업의 문[業門 kammadv?ra]’이라 부른다. 몸을 통해 표현되는 의욕은 신업(身業)이며, 말을 통해 표현되는 의욕은 구업(口業)이고, 생각?계획?사상?기타 정신적 작용이 밖으로 표현되기 이전 상태의 의욕을 뜻으로 짓는 의업(意業)이라 한다. 따라서 의욕이라는 한 가지 요인은 그것이 드러나는 경로 여하에 따라서 세 가지 형태의 업으로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업에 대한 이런 정도의 개괄적 뜻풀이만으로는 ‘바른 견해’를 갖기에 부족하다. 바른 견해를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첫째, 업에는 윤리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선업과 불선업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둘째, 구체적으로 무엇이 선업이고 무엇이 불선업인지를 아는 것, 셋째, 이런 업이 솟아나오게 되는 근원적 뿌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경에 나오듯이 “고귀한 제자가 무엇이 불선업인지를 알고 그 불선업의 뿌리를 알고, 또 무엇이 선업인지를 알고 그 선업의 뿌리를 알면, 그는 곧 ‘바른 견해’를 가진 것”12)이다.


(i)이런 점들을 정리해 보면 먼저, 업은 불선한(akusala) 것과 선한(kusala) 것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선업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 정신적 계발에 방해가 되는 것, 나와 남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반면에 선업은 도덕적 면에서 권장할 만한 것, 정신적 계발에 도움이 되는 것, 나와 남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ii)선?불선, 이 두 가지 경우 각각에 해당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부처님께서는 중요한 것을 열 가지씩 선택하여 이를 열 가지 불선업 및 열 가지 선업이라 부르셨다. 이 열 가지 중 세 가지는 몸으로, 네 가지는 말로,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는 뜻으로 짓는 업이다. 열 가지 불선업의 과정을 그것이 표출되는 문(門)에 따라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업(k?yakamma)

    1. 생명을 해침[殺生]

    2.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함[偸盜]

    3. 감각적 쾌락 면에서의 그릇된 행위[邪淫]

구업(vac?kamma)

    4. 거짓말[妄語]

    5. 말전주[兩舌]13) 

    6. 거친 말[惡口]

    7. 쓸데없는 말[綺語]

의업(manokamma)

    8. 탐심[貪]

    9. 악의[瞋]

   10. 그릇된 견해[癡]


이 열 가지 불선업에 반대되는 것이 바로 열 가지 선업이다. 다시 말해 앞의 살생에서부터 쓸데없는 말까지의 일곱 가지 불선업을 짓지 않고 탐심과 악의에서 헤어나고, 바른 견해를 견지하는 것, 이 열 가지가 선업이다. 설령 앞의 일곱 가지 불선업을 짓지 않으려는 생각이 오직 마음에서 그칠 뿐 명백한 외적 행위를 수반하지 더라도 이들을 신체적, 언어적 선업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런 마음상태가 몸과 말의 기능을 제어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iii)업은 앞에서 ‘뿌리(m?la)’라고 부른 그 기저 동기들에 입각해서 선과 불선으로 구분되며, 이 기저 동기에 따라 이에 수반되는 의욕의 도덕적 성질이 달라진다. 그래서 업은 그 뿌리가 선한지 불선한지 여하에 따라 선한 것이 되기도 하고 불선한 것이 되기도 한다. 선업과 불선업의 뿌리는 각각 세 갈래이다. 불선의 뿌리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탐욕(lobha), 진에(dosa), 치암(moha)의 세 가지 번뇌이다. 이들 번뇌로부터 비롯된 행위는 모두 좋지 못한 업이 된다. 세 가지 선의  뿌리는 이와 반대의 것으로서 옛 인도 어법대로 부정의 접두사 ‘a[無]’를 붙여 무탐욕(alobha), 무진에(adosa), 무치암(amoha)으로 표기되는 것들이다. 이 세 가지가 어휘상으로 부정적 형태를 띠고 있어도 그것은 이 세 가지 번뇌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에 수반되는 덕성까지도 포함한다. ‘무탐욕’은 (욕심)버림[出離], 초연함, 관대함을 내포하고 ‘무진에’는 자애, 연민, 친절을, 그리고 ‘무치암’은 지혜를 내포한다. 이 세 가지  뿌리에서 나오는 행위는 어떤 것이든 선한 업이 된다.


업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어떤 행위의 윤리적 성질 여하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는 효능에 있다. 우주에 편재하는 하나의 법칙이 있어 이 법칙의 작용으로 일체의 의욕이 빚는 행위는 응보적 결과로 끝을 맺는다. 이 결과를 업보(vip?ka) 또는 과(果 phala)라 한다.14) 행위와 그 과보를 잇는 이 법칙은, 불선한 행위는 고통을 가져오고 선한 행위는 행복을 가져온다는 단순한 원리로 작용한다. 과보는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꼭 금생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업은 여러 생에 걸쳐서 작용할 수도 있고 여러 겁을 잠재해 있다가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의욕이 빚는 행위를 할 때마다  그 의욕은 식의 흐름에 흔적을 남기고 이 흔적은 잠재력으로 저장된다. 저장된 업이 숙성을 도와주는 조건들을 만나면 잠재 상태에서 깨어나 어떤 결과를 촉발시켜 원래의 행위에 상응하는 과보를 가져오게 한다. 이런 과보는 금생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다음 생, 또는 그 다음의 어느 생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업은 재생의 원인이 되어 다음 생의 존재 형태를 결정할 수도 있고, 한 생애 속에서 행복과 고통, 성공과 실패, 발전과 퇴보 등 다양한 경험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때 어떤 방식으로 업이 성숙하든 선업은 좋은 결과를, 불선업은 좋지 못한 결과를 낳는다는 보편법칙에는 변함이 없다.


이 원칙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세속적인 바른 견해를 견지하는 것이 된다. 일단 이런 견해가 확립되면 다른 다양한 형태의 잘못된 견해는 공존할 수 없으므로 잘못된 견해들을 그 즉시로 배제할 수 있다. 즉, 금생의 내 행위가 미래의 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를 확실히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금생에서 끝나고 우리의 의식은 죽음과 더불어 끝난다는 허무주의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또 이 견해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에 입각하여 선과 악, 정과 사를 구분하기 때문에 선악을 개인적 의견의 단순한 발로나 사회 통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 주장하는 윤리적 주관주의와도 상반된다. 또 이 견해는 사람들이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 제약이 있기는 해도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이 언제나 어쩔 수 없는 필요에 따라 내려질 뿐이고 그러므로 자유의지란 환상이며 도덕적 책임 역시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완고한 결정론적’ 노선과도 상반된다.


업과 그 과보를 바로 살펴보라는 ‘바른 견해’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 중 어떤 부분은 오늘날의 사고경향과 상충되는 면 없지 않기 때문에 그 차이점을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바른 견해’에 대한 가르침은 선과 악, 정과 사의 문제가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엇이 좋고 나쁘며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상투적 의견들을 초월하는 심오한 문제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한 사회 전체가 무엇이 도덕적으로 바른 가치인지에 대해 혼란에 빠질 수 있고, 그래서 심지어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어떤 특정 행위를 옳다고 손뼉을 치고 그와 다른 행위를 그르다고 비난한다 해서 그 도덕적 가치가 진정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도덕적 기준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이며 따라서 가변적일 수 없다. 행위의 도덕성 여부는 그 행위가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졌느냐 하는 조건에 매여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어떤 행위를, 또는 그 행위를 이루는 배경인 도덕규범을 평가할 도덕성의 객관적인 기준은 엄존한다.

도덕성에 대한 이러한 객관적 기준이야말로 담마[dhamma 法]가 담마 되는 소이(所以)이다. 의욕이라는 모태에서 행위가 나오며 행위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사실, 그리고 행위와 그 결과간의 상응성은 근본적으로 의욕 그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은 법의 타당성에 초개아적 기반이 되는 것이며 담마가 진리와 정의로움에 대한 객관적 법칙이 되는 소이인 것이다. 여기에 신과 같은 재판관이 있어서 상벌을 통해 전우주적 상황전개를 관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행위 그 자체가 원래 띠고 있는 도덕적, 비도덕적 성격으로 인해 그에 알맞은 결과를 발생시키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업과 그 과보에 관한 바른 견해라는 것은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에는 도덕적 업력이 있다고 가르치는 저명한 정신적 스승들의 말씀을 받아들여 알고 있는 수준일 것이다. 비록 스스로 확인해서 알게 된 것은 아니더라도 업의 원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여전히 정견으로서의 일면은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올바른 견해는 이해하는 일, 특히 사물의 전 체계[法界]에서 인간의 위치를 이해하는 일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수준의 견해 그 자체로도 ‘정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욕이 빚는 행위가 도덕적 힘을 발휘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만큼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제대로 파악한 셈이 된다. 뿐만 아니라 행위가 갖는 업력(業力)에 대한 바른 견해는 우리 이해범위 저 너머에 있는 순전히 믿음의 대상만은 아니다. 이 업의 원리는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사실이 될 수도 있다. 깊은 정신집중의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도 볼 수 있는 초감각적 투시력인 ‘천안(天眼 dibbacakkhu)’이라는 특수한 기능을 계발할 수 있다. 이 특수 기능이 발달하면 그 눈을 살아있는 존재의 세계로 돌려 업의 법칙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펴 알 수 있다. 이 천안의 능력을 갖게 되면 존재들이 죽었다가 그 업에 따라 어떻게 재생하게 되며, 그들이 선업이나 악업의 숙성으로 행복을 누리거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직접적 지각을 통해서 스스로 바로 볼 수 있게 된다.15)



더 높은 바른 견해


업과 그 결실에 대해 이처럼 바른 견해를 갖게 되면 도덕적으로 건전한 행위를 충분한 근거를 마련하게 되고 따라서 윤회의 세계에서 상당히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해탈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사람 모처럼 업의 원리를 수용했음에도 막상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 세속적 성취에 한정시켜버리고 만다. 결국 선한 업을 짓는 동기가 지금 여기에서 번영과 성공을 가져올 선업을 축적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버린다. 즉, 사람으로 행복하게 다시 태어나거나 또는 천상세계에서 천복을 누리는 데에 목표를 두게 되는 것이다. 사실 업의 인과논리 안에는 업과 보의 윤전(輪轉)을 초탈하고자 하는 의욕을 일으키는 요소가 결핍되어 있다. 윤회라는 존재질서로부터 완전히 해탈하는 데 필요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깊고 차원이 다른 안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가장 높은 세계에 속하는 존재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형태의 윤회적 존재가 본래 가진 결함과 그 결함이 안고 있는 고의 성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낳는 그런 안목이어야 한다.


해탈로 인도하는 이 출세간적 바른 견해는 곧 사성제(四聖諦)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 올바른 이해가 팔정도의 첫 번째 항목으로 등장하는 바른 견해, ‘성스러운 바른 견해’라는 이름 그대로의 바른 견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바른 견해의 내용을 사성제와 연관시켜 명백하게 규정하셨다.


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에 대한 이해이고, ‘고의 집기(集起)’에 대한 이해이고, ‘고의 소멸’에 대한 이해이고,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이해이다.16)


팔정도 수행은, 사고와 성찰의 방식을 통해서 어슴푸레하게 밖에는 이해될 수 없는 사성제의 개념적 이해로부터 시작되어 궁극적 깨달음과 동등한 수준의 명철함을 통해서 사성제의 진리성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될 때 그 절정에 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성제에 대한 바른 이해야말로 고를 종식시키는 길의 시작과 완성 모두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사성제의 첫 번째는 ‘고(苦)’, 즉 존재라는 것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본래적 불만족성에 관한 진리이다. 이 ‘고’는 모든 형태의 삶에 본유하는 무상, 고통, 그리고 영속적 불완전성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고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이 고이며, 늙음이 고이며, 병듦이 고이며, 죽음이 고이며, 슬픔, 한탄, 고통, 고뇌, 절망이 고이다. 즐겁지 못한 것과 마주치는 것이 고이며, 즐거운 것과 떨어지는 것도 ‘고’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역시 고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의 쌓임[五取蘊]이 고이다.17)


위의 마지막 구절은 주의해서 살펴보지 않고서는 그 뜻을 잘 이해할 수 없는 포괄적인 언명이다. ‘다섯 가지 집착의 쌓임[五取蘊]’은 우리 존재의 본질을 분류적 접근방식에 의해 규명한 결과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결국 우리 존재라는 것은 물질적 형상[色], 느낌[受], 지각[想], 정신적 형성들[行], 의식[識], 이 다섯의 한 벌로 이루어졌으며, 이 모두가 집착과 얽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 다섯이고, 그 다섯이 곧 우리다. 무엇을 자신이라 여기든, 무엇을 자신의 자아라고 우기든, 그 무엇은 결국 이 다섯 쌓임이라는 한 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 쌓임이 함께 작용하여 만들어낸 온갖 종류의 생각, 감정, 관념, 성벽(性癖) 속에서 살고 있으니 이것이 곧 ‘우리의 세계’다. 이렇게 해서 다섯 쌓임이 바로 ‘고’라는 부처님의 언명은 사실상 우리의 모든 경험, 우리의 전 존재가 고의 범주에 속한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부처님께서는 다섯 쌓임을 두고 꼭 ‘고’라고 단언해야만 했을까? 부처님은 다섯 쌓임이 모두 ‘고’인 이유는 그들이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순간순간 변한다. 생겨났다 꺼져버린다. 또 그들 배후에 따로 이 변화를 겪어내는 어떤 실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존재의 구성요소들 항상 바뀌고 있고 영속하는 어떤 핵심도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요소들 속에는 우리가 안전판으로 삼기 위해 붙들어 둘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끊임없이 해체되고 있는 흐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영속을 구하는 욕구에서 붙들고 있다 보면 고에 함몰될 뿐이다.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는 ‘고의 원인’을 적시하고 있다. 부처님은 고로 귀결되는 일련의 마음의 때[垢] 중에서 ‘갈애(ta?h?)’를 가장 파급 효과가 큰, 주된 ‘고의 원인’으로 집어내셨다.


이것이 고의 집기(集起)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 반복되는 존재를 낳고, 즐김(nandi)?욕망(r?ga)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그리고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곧 이 갈애이다. 이른바 감관의 즐거움을 구하는 갈애[欲愛], 존재를 구하는 갈애[有愛], 무존재를 구하는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18)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이 인과 관계를 역으로 뒤집은 것이다. 갈애가 고의 원인이라면 고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갈애를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이 고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이 갈애의 완전한 시듦이요, 그침이며, 놓음이요, 버림이며, 벗어남이요, 초연해짐이다.19)


갈애가 제거되었을 때에 오는 완전한 평화 상태가 열반, 곧 모든 조건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로, 이는 우리가 금생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탐?진?치의 불길이 꺼지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고의 멸에 이르는 길’, 열반의 실현으로 가는 길을 드러내 보인다. 이 길이 곧 성스러운 팔정도 바로 그것이다.


사성제에 관한 바른 견해[正見]는 두 단계로 발전한다. 첫 단계는 진리에 수순(隨順)하는 바른 견해(sacc?nu-

lomika samm?-di??hi)이고 두 번째는 진리를 꿰뚫어보는[廓撤] 바른 견해(saccapa?ivedha samm?-di??hi)이다. 진리에 수순하는 바른 견해를 얻기 위해서는 그 진리가 우리들 삶 속에서 갖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이해는 처음에는 진리를 배우고 공부하는 데서 생겨난다. 그런 연후에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 진리들[四聖諦]을 깊이 숙고해 나가면 그 이해가 더욱 깊어져서 드디어 그것의 진실성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서도 진리를 아직 투철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진리를 이해했다 해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개념의 문제에 그칠 뿐 여전히 미흡하다. 진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명상수행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첫째 지속적 집중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이고, 그런 연후에는 통찰력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통찰력은 존재의 구성요소들의 참다운 특성들을 판별하려는 목적으로 ‘다섯 쌓임[五蘊]’을 관할 때 생겨난다. 이러한 관법 공부가 절정에 달하게 되면 마음의 눈은 ‘다섯 쌓임’을 구성하는, 조건에 매인 현상들을 떠나 모든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즉 열반 쪽으로 옮겨 간다. 통찰력이 깊어지면 열반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시선의 옮김’의 결과 마음의 눈이 열반을 볼 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그 모두를 한꺼번에 꿰뚫어보는 일이 일어난다. 열반, 즉 고를 넘어선 상태를 보게 됨으로써 그 사람은 오온을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그리고 오온이 단지 조건에 매인 것이며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고(苦)가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안목을 얻게 된다. 열반이 실현됨과 동시에 갈애는 멈춘다. 이때 비로소 갈애가 고의 진짜 원천이라는 사실이 이해된다. 열반을 보게 되면 존재가 빚어내는 소란으로부터 벗어난 평화로운 상태가 된다. 또한 팔정도를 수행함으로써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팔정도가 정말로 고의 종식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사성제를 꿰뚫어 볼 수 있는[廓撤] 바른 견해는 팔정도 수행의 시작 단계가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진리에 수순(隨順)하는 바른 견해, 즉 우선 배워서 알고 숙고를 통해서 강화되는 바른 견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로 이 바른 견해가 생기면 우리는 수행, 다시 말해 계?정?혜 삼학의 공부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 수행이 무르익으면 지혜의 눈이 저절로 열려서 진리를 꿰뚫게 되고 마음은 고(苦)의 굴레에서 해방된다.

Ⅲ 바른 의도[正思 samm? sa?kappa]

팔정도의 두 번째 항목은 빠알리어로 ‘삼마 상깝빠’인데 우리는 이를 ‘바른 의도(right intention)’로 번역할 것이다. 이 용어는 ‘바른 생각(right thought)’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생각’이라는 말이 특별히 의지나 의욕과 같은 정신활동의 목적적, 능동적 측면을 지칭하며, 정신활동의 인지적 측면은 첫 번째 항목인 ‘바른 견해’의 몫이라는 단서를 붙인다면 ‘바른 생각’이란 표현도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인지적 측면과 능동적 측면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마음의 이 두 측면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서로 얽히어 상호작용하고 있다. 감정적 선호가 견해에 영향을 미치고 견해는 감정적 선호를 결정한다. 그래서 깊은 숙고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바른 견해를 얻고, 탐구를 통해 그런 견해를 확인함과 동시에 가치체계 재구성된다. 가치체계가 재구성되면 새로운 시각이 생기고, 이 새로운 시각에 상응하는 목표 쪽으로 마음 움직이게 된다. 그러한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한 마음씀이 바로 ‘바른 (right intention)’이다.


부처님은 바른 의도를 세 가지로 설명하신다. 욕심놓음(renunciation)의 의도, 선의(good will)의 의도, 해치지 않음(harmlessness)의 의도가 그것이다.20) 이 세 가지는 이에 대응하는 세 가지 바르지 못한 의도인 욕심냄(desire)의 의도, 악의(ill will)의 의도, 해침(harmfulness)의 의도와 각기 대립하고 있다.21) 이들 바른 의도는 각기 상대되는 바르지 못한 의도들에 맞선다. 욕심을 버리려는 의도는 욕심내려는 의도에 맞서고, 선의를 베풀려는 의도는 악의의 의도에, 그리고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는 해치려는 의도에 맞선다.


이처럼 생각이 두 갈래로 나뉜다는 사실을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다. (《중부》19경) 숲 속에서 명상 수행을 하면서 해탈을 추구하고 있을 때 자신의 생각이 두 가지 상이한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던 것이다. 부처님은 욕심냄?악의?해침의 의도를 한 쪽에, 욕심놓음?선의?해치지 않음의 의도를 다른 쪽에 세웠다.

첫 번째 부류의 의도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볼 때마다 이런 의도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로움을 끼치고, 지혜를 흐리게 하고,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이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깊이 숙고하면서 부처님은 그런 생각들을 마음에서 몰아내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셨다. 반면, 두 번째 부류의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런 생각들이 이로운 것이며, 지혜의 증장에 도움이 되며, 열반의 성취를 돕는다는 것을 알아차리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런 바른 생각들을 더욱 강화하고 완성에 이르도록 하셨다.


바른 의도는 팔정도 중 앞에서 두 번째 자리, 즉 정견과 그리고 정어로 시작되는 세 도덕적 요소들[正語?正業?正命]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마음의 의도적 기능은 우리의 인식상의 시각과 실제 활동양태를 잇는 필수적인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우선 행위 쪽에서 보면 행위는 언제나 생각에서 연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각은 몸과 말에 방향을 지시하고 그것들이 행위로 옮겨지도록 몰아세우고, 그들을 마음이 지니고 있는 목적과 이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등, 언제나 행위에 앞선다.

한편 이들 목적과 이상, 즉 우리의 의도는 이번에는 다시 한 걸음 더 되돌아가 그것에 앞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견해 쪽을 돌아보게 만든다. 따라서 그릇된 견해들이 지배하고 있을 때는 거기서 산출되는 것은 그릇된 의도이며 다시 이는 불건전한 행위를 일어나게 만든다. 그래서 행위의 도덕적 효율성을 부정하고 성공의 척도를 오직 이득이나 지위에 두는 사람은 이득과 지위만을 열심히 추구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식의 추구행위가 확산되면 그 결과는 고(苦)뿐이다. 귀추(歸趨)는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부?지위?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애쓰는 개인, 사회집단, 국가들 어마어마한 고를 겪게 될 뿐이다. 끝없는 경쟁, 갈등, 불의, 억압의 원인이 마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탐?진?치 삼독에 의해서 조종되는 생각들이 표출 것, 의도가 드러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의도가 바를 때는 행위도 올바를 수 있다. 그리고 의도가 올바르게 되는 데에는 올바른 견해만큼 확실한 보장도 없다. 행위에는 반드시 응보적 결과가 뒤따른다는 업의 법칙을 인지하게 되면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를 이 법칙에 준해서 설정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의도의 표현인 행동도 ‘바른 행위의 규범[戒]’을 따르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사람이 바르지 못한 견해를 견지할 경우, 그런 견해에 바탕을 둔 행위?말?계획?목적은 고(苦)로 치닫게 되고, 바른 견해를 가질 경우, 그런 견해에 바탕을 둔 행위?말?계획?목적은 열반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말씀으로 이런 이치를 간명하게 요약하신다.22)


바른 견해를 설명하는 여러 체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성제에 대한 이해를 들기 때문에 사성제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바른 의도의 내용도 결정될 것이 틀림없다. 이런 사실은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사성제를 자신의 삶과 연관해서 이해하면 욕심놓음[出離]의 의도가 생겨나게 되고 다른 존재들과 연관시켜 이해하면 다른 두 가지 바른 의도, 즉 선의[無?]의 의도, 해치지 않아야겠다는[無害] 의도가 일어난다. 우리의 삶에 고(苦)가 속속들이 스며있으며, 이 고가 갈애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욕심놓음 쪽으로, 즉 갈애와 그 갈애의 대상들을 버리는 쪽으로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다. 다시 다른 존재[有情]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사성제에 비추어 보면 공부를 해나갈수록 선의를 베풀고 해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크게 자라난다. 모든 다른 존재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를 겪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고찰은 선의의 생각, 즉 모든 존재의 안녕과 행복, 평화를 기원하는 자애심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모든 존재가 고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해치지 않겠다는 생각, 즉 그들도 고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기원하는 연민심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팔정도의 계발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 두 항목은 힘을 합쳐 세 가지 불선한 뿌리, 즉 탐?진?치를 약화시키기 시작한다. 인식에 있어 주된 때[垢, 煩惱]인 치암(癡暗)은 지혜의 싹이라 할 수 있는 바른 견해의 저항을 받게 된다. 바른 견해가 완전한 깨달음의 단계로 발전해야 비로소 치암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겠지만 깜빡거리는 미미한 수준의 바른 견해들도 각각 치암의 완전한 파괴에 이바지한다. 다른 두 가지 뿌리인 탐욕과 성냄은 감성의 때이기에 의도의 방향부터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버림, 선의, 무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탐욕과 성냄에 대한 교정수단이 된다.


탐욕(貪慾)과 성냄[瞋心]은 뿌리가 깊어서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효율적인 전략을 구사하면 이들을 극복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부처님이 고안한 팔정도는 간접적 접근방식을 활용한다. 즉, 탐욕과 성냄을 정면으로 공략하기보다 먼저 이들이 일으키는 생각부터 다룬다. 탐욕과 성냄은 ‘생각’의 형태로 표출되기 때문에 그와 정반대되는 생각으로 대체시켜 나가는 일련의 ‘생각 바꿈’ 과정에 의해서 그 뿌리를 부식(腐蝕)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버림을 의도적으로 거듭 생각하는 것은 탐욕을 다스리는 좋은 약이다. 탐욕이라는 때[心垢]는 관능적인 생각, 획득하려는 생각, 소유하려는 생각 등 욕심스러운 생각들로 표출된다. 한편 버림의 생각은 무탐욕이라는 선한 뿌리로부터 솟아나며, 개발하면 할수록 무탐욕의 뿌리를 더 활성화시키는 환원적 기능을 한다. 서로 상반되는 생각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버림의 생각이 일어나면 욕심스러운 생각은 밀려나게 된다. 그래서 무욕이 탐욕의 자리를 대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선의와 해치지 않음의 생각도 성냄[瞋心]에 대해 해독작용을 한다. 성냄은 화?적의?복수심 같은 악의의 생각으로, 아니면 잔인?공격?파괴충동 같은 해악의 생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선의의 생각이 악의(惡意)를, 무해의 생각이 해악(害惡)을 막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성냄이라는 불건전한 뿌리 그 자체를 잘라 들어가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려는 의도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라 하셨다. 세상의 길은 욕망의 길이며, 이 길을 따르는 깨닫지 못한 중생은 바깥 대상에서 행복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그 대상을 좇아 행복을 갈구하며 욕망의 흐름에다 자신을 내맡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버림의 소식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길이다. 욕망의 유혹에 저항해야 하고 종국에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하신다. 욕망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나빠서가 아니라 고의 뿌리이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23) 따라서 갈애와 갈애의 충동질을 외면해 버리는 이 버림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되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 된다.


부처님은 모든 사람이 가정생활을 떠나 절로 들어가도록 요구하지도 않으셨고 또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당장 포기하라고 이르지도 않으셨다. 버림을 실천함에 있어 어느 정도 버려야 할지는 각자의 성향과 처지에 달린 문제이다. 그러나 해탈을 증득하려면 갈애를 완전히 근절시켜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수행의 엄정한 지침이다. 갈애를 극복하는 그만큼 공부의 진척은 촉진되기 마련이다. 물론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그 필요성은 엄존한다. 갈애가 고의 원인인 이상 고를 끝장내려면 갈애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음을 버림 쪽으로 향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집착을 놓아버리려 노력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강력한 내적 저항에 부닥치게 된다. 마음은 집착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장악력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손에 넣고, 거머쥐는 데 익숙해진 습관을 마음 한 번 먹었다고 해서 쉽게 놓아버릴 수는 없다. 버림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고 집착을 버리기도 원하지만, 막상 그 필요성이 현실로 다가오면 마음은 뒤로 물러나 욕망의 손아귀 안에서 안주하고 계속 즐기려 든다.


그러므로 욕망의 족쇄를 과연 어떻게 부숴버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부처님은 결코 억압적 방법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가득 찬 채로 욕망을 몰아내려 덤비는 방법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보시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제를 표면 아래로 가라앉힐 뿐이. 문제는 계속 뿌리를 뻗는다. 마음을 욕망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부처님께서 일관되게 제시하시는 도구는 이해력이다. 진정한 버림은, 마음속으로 미련을 가진 채 억지로 사물을 포기하도록 자신을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더 이상 우리를 묶을 수 없도록 사물을 보는 눈 그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욕망의 성질을 이해하게 될 때, 날카로운 주의력을 기울여 욕망을 면밀히 점검할 때, 욕망은 싸울 것도 없이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욕망의 장악력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는 욕망은 언제나 어김없이 ‘고’와 밀착돼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결핍감과 충족감이 끝없이 반복하는 욕망이라는 현상은 모두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 눈에 의해서 좌우되는 문제이다. 우리가 욕망에 매인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욕망을 행복을 쟁취하는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욕망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되면 욕망의 힘은 줄어들게 되고, 그 결과는 마침내 욕심놓음 쪽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로운 숙고[如理作意 yoniso manasik?ra]’다. 인식이 생각에 영향을 미치듯이 생각도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평소 우리들의 인식에는 ‘지혜롭지 못한 숙고(ayoniso manasik?ra)’가 섞여 있다. 보통 우리는 사물의 겉모습만 보거나 당장의 관심과 욕망에 이끌려 대충 훑어볼 뿐,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일의 뿌리를 파 보거나 장기적으로 미칠 결과를 철저히 탐구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행위의 기조를 이루는 어떤 숨어 있는 특정한 정신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것들이 가져올 결과를 탐구하고, 우리의 목표가 지니는 가치를 평가해 보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고려, 즉 ‘지혜로운 숙고’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점검할 때 우리의 초점은 무엇이 즐거운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참된 것이냐에 맞추어지게 된다. 우리는 편안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참된 것을 찾아나갈 준비와 각오를 하게 된다. 진정한 안녕은 편안한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참된 쪽에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욕망에는 항상 고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때는 고가 아픔이나 짜증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불만에 의한 긴장상태로 지속되기도 한다. 어떻든 욕망과 고, 이 둘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동반자이다. 이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서 욕망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그 전 과정을 살펴보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욕망이 처음 고개를 쳐들 때에는 부족감, 즉 결여의 고통을 만들어낸다. 이 고통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애를 쓴다. 만약 이런 노력이 실패하면 우리는 좌절과 실망, 때로는 절망마저 느끼게 된다. 성공의 즐거움 역시 이런 고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처럼 얻은 자리를 다시 잃게 될까봐 걱정한다. 우리의 지위를 확보하고 우리의 영역을 보호하고 더 많이 얻고, 더 높이 올라서고, 더 확고한 지배체제를 세우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 이렇듯 욕망이 내세우는 요구는 끝없이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개개의 욕망은 그 대상이 영원하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얻은 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욕망의 대상들은 사실 영원하지 않다. 부(富)나 권력은 사라져버리고 사람은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다. 헤어짐의 고통은 집착의 강도에 비례한다. 강한 집착은 큰 고통을 가져오고 적은 집착은 적은 고통을 가져오며 집착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24)


욕망에 내재해 있는 고에 대해 관(觀)하는 것 역시 마음을 버림 쪽으로 돌리는 한 가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버림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곧바로 관하는 것이다. 욕망에서 버림으로 이행하는 것을 혹자는 행복으로부터 슬픔으로, 풍요로부터 빈곤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상상할지도 모르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칠고 뒤엉킨 쾌락에서 고양된 행복과 평화로, 노예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주인의 입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욕망은 궁극적으로 두려움과 슬픔을 낳지만 욕심놓음은 두려움 없음과 기쁨을 가져다준다. 이에 더해서 욕심놓음은 계?정?혜 삼학(三學)이 제각기 단계적 임무를 완수하도록 촉진시켜 준다. 다시 말해 계는 정을 위한 기초가 되고, 정은 혜를 위한 기초가 되며, 또 혜는 더 높은 수준의 계를 위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욕심놓음은 행위를 순화하고 집중력을 도우며 지혜의 씨앗을 틔운다. 사실 수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전 과정은 놓음이 발전해 가는 과정이며, 놓음의 궁극 단계인 열반, 즉 ‘존재를 형성하는 모든 기반 요소들을 놓아버림(sabb'?padhi-pa?inissagga[棄捨])’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렇듯 욕망의 위험과 버림의 이로움을 체계적으로 관하게 되면 점차로 우리 마음을 욕망의 지배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집착은 늦가을 나뭇잎처럼 자연스럽게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이런 변화가 갑자기 오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수행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오기 마련이다. 거듭거듭 관하고 있는 동안에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쫓아내고 버림의 의도가 욕망에 찬 의도를 제거하게 된다.



선의를 베풀려는 의도


선의의 의도는 악의의 의도, 노여움과 성냄에 지배되는 생각과 맞선다. 욕망의 경우 마찬가지로 악의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두 가지 적절치 못한 방식이 있다. 한 가지는 행동이나 말로 분노나 혐오를 표현함으로써 악의에 굴복하는 것이다. 이 접근방식은 긴장을 당장 해소하고 분노를 자신의 몸 밖으로 뱉어버리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위험을 불러온다. 이런 접근 방식은 남의 원한을 사고 보복을 불러오며 적을 만들고 인간관계를 악화시키고 불선업을 생기게 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에 가서는 악의가 몸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몸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계속 망가뜨리게 된다. 다른 한 가지 접근 방식은 악의를 억압하는 것인데 이 또한 악의의 파괴적인 힘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이 방식은 다만 악의의 힘을 돌려서 안으로 밀어 넣는 꼴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이 힘은 자기비하, 만성우울증이나 이성을 잃고 폭력을 휘두르는 경향 등의 이상한 형태로 변하게 된다.

 

악의에 대응하는 처방으로, 특히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 부처님께서 권하신 처방이 빠알리어로 ‘멧따(mett?)’라고 하는 자비심이다. 이 말은 ‘친구(mitta)’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일상적인 우정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는 차라리 이 말을 ‘사랑어린 친절[loving kindness 慈愛]’이라는 복합어로 옮기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이 복합어가 다른 존재들에 대해 이기심 없는 짙은 사랑의 느낌을 그들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진심어린 관심으로 외사(外射)한다는 본래의 의도를 가장 잘 살려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애’는 단순한 감상적 선의도, 도덕적 의무감이나 신의 뜻에 양심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의무감과도 무관해야 하며 자발적인 따뜻함을 특성으로 하는 깊은 내면적 느낌이어야 한다. ‘자애’의 염(念)이 절정에 달하면 ‘범천(梵天)이 거주하는 저 높은 세계[Brahmavih?ra]’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그곳은 일체 중생의 안녕을 기원하는 염력을 사방으로 방사(放射)하는 염(念) 중심의 거룩한 세계이다.


‘자애’가 뜻하는 사랑은 관능적 사랑과 구별되어야 하며 물론 특수한 개인적 관계에 얽힌 사랑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관능적 사랑은 일종의 갈애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개인적 관계에 담긴 사랑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집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쾌락이나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우리의 가족이나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자아상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애정의 느낌이 자기와 관련된 요소를 완전히 벗어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범위는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애정은 특정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 구성원들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누군가는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애’가 담고 있는 사랑은 몇몇 개인들에 대한 특정한 관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자기와의 사적 관련성이 전혀 없다. 우리는 남들을 향한 자애의 염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 자애의 마음이 완전한 것이 되려면 아무런 제한이나 유보 없이 일체 중생에게 퍼져나가는 보편적 마음상태로 계발되어야 한다. 자애에 이런 우주적 차원의 보편성을 주입하는 길이 바로 명상 훈련을 통해 자애를 계발하는 방식이다.

아무런 훈련 없이 저절로 생기는 선의의 감정을 진심(瞋心)에 대한 치유책으로 삼기에는 너무 산발적이고 범위도 제한되어 있다. 사랑을 의도적으로 계발한다는 발상은 억지스럽고 기계적이며 계산적인 것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사랑은 일부러 불러일으키거나 노력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일 때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다만 불교에서 문제 삼는 것은 사랑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우러나는가 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사랑하라고 마음에 명령할 수는 없기에 그것을 계발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시작 단계에서는 의도적인 노력이 다소 필요하다. 그러나 수행을 해나가는 동안 사랑의 느낌이 마음에 차츰차츰 깊이 배어들어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성향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자애의 계발 방법은 ‘자애에 대한 명상(mett?-bh?van?)’으로 불교 명상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수행은 자기 자신을 향한 자애의 계발에서 시작한다.25) 자기 자신을 자애의 첫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진정한 자애는 자기 자신에게 참다운 사랑을 느끼는 경우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분노나 적개심의 대부분이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부정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애가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하면 우리의 부정적 태도가 만들어 놓은 두꺼운 껍질을 녹아내리게 해서 친절과 동정이 밖으로 흘러나갈 수 있다.


자기를 향해서 자애의 감정을 키워가는 데 익숙해지면 그 다음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자애의 감정을 펴는 단계이다. 자애의 확장은 자기 의식을 변화시키고 자기의 정체성을 통상적 한계성 너머로 넓혀서 남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변화는 방법론상 순전히 심리적인 것이며 모든 존재에 보편적 자아가 내재해 있다는 식의 신학적, 형이상학적 주장들과는 전연 무관하다. 이 변화는 단순하고도 매우 수월한 투영과정에서 시작되며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주관을 공유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적어도 상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 절차는 자기 자신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우리 존재의 기본 추동력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바람임을 알게 된다.

일단 자신 속에서 이런 사실을 보게 되면, 우리는 곧바로 모든 중생이 이 같은 근본적인 바람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남들을 향해 자애(mett?)를 계발시키려면 먼저 행복을 바라는 그들의 내심을 상상력을 통해 공유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우리는 행복을 향한 우리 자신의 욕구를 실마리로 삼을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이 욕구를 남들의 근본적 추동력으로 경험해 보고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와서 그들이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기를, 그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그들을 향해 펴 보내는 것이다.


자애를 펼치는 방법은 처음에는 특정 그룹에 속하는 개인들을 향해 자애의 염(念)을 보내는 데서 시작한다. 이들 그룹의 배열순서는 먼저 자기와 가까운 쪽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차적으로 먼 쪽을 향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부모나 스승과 같이 친애하는 어느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음에는 어느 한 친우에게로, 다음에는 중립적인 어느 한 사람에게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에게 적대적인 어느 한 사람에게로 옮겨간다. 이런 관계 유형은 나와 그들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 것이긴 하지만 여기서 계발해야 할 사랑은 그런 관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공통적 행복 염원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각자에 대해 그의 영상을 초점에 떠올리고는 “그가 편안하기를! 그가 행복하기를! 그가 평화를 누리기를!”하는 생각을 방사한다.26) 그 사람을 향해 선의와 친절의 따뜻한 느낌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다음에야 그 다음 사람을 향한다. 개개인에게 보내는 것이 어느 정도 성공하면 더 큰 단위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모든 친우들을 향해, 모든 중립적인 사람들을 향해, 모든 적대적인 사람들을 향해 자애를 계발하려 노력한다. 그 다음에는 동쪽, 서쪽, 남쪽, 북쪽, 위, 아래 등 여러 방향으로 펴나가는, 방향에 따른 펼침에 의해 자애가 넓어질 수 있고, 그리고는 아무런 구별 없이 모든 존재로 확대될 수 있다. 마지막에는 온 세상을 ‘방대하고, 숭고하고, 한량없고, 미움도 싫음도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가득 채운다.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는 잔인하고, 공격적이고, 난폭한 생각에 반하여 일어나는, 연민(karu??)에 이끌리는 생각이다. 연민은 자애를 보완해준다. 자애가 남들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특성을 갖는 데 비해서 연민은 남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특성을 가지며 이 기원 역시 일체 중생에게로 한량없이 뻗어나가야 할 성질의 것이다. 이 생각은 남들의 주관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내면세계를 깊이, 그리고 총체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존재가 우리 자신과 같이에서 벗어나기를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통과 두려움, 슬픔, 그 밖의 여러 가지 형태의 고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연민 생겨난다.


연민을 명상 수련의 한 방식으로 삼으려면 실제로 고통 받고 있는 그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시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연민의 정 실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는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고통을 직접 목격한대로, 아니면 상상력을 써서 그려보는 식으로 깊이 숙고한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고’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내 마음에 비추어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반복하면서, 가슴 속에서 강한 연민의 정이 솟아오르게 될 때까지 깊은 숙고를 지속적으로 훈련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 감정을 표준으로 삼아서 다른 개인들에게도 돌려가며 적용시켜 그들이 각각 어떻게 고통에 노출되어 있는지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따뜻한 연민의 정을 방사한다. 연민의 폭과 밀도를 더 높이려면 유정(有情)들이 접하는 가지가지 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한 고의 여러 가지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사성제의 첫 번째인 고성제가 훌륭한 안내자가 될 수 있다. 늙음을 피할 수도, 병에서 벗어날 수도, 죽음을 비켜갈 수도 없는, 그리고 슬픔?비탄?괴로움?근심?절망 등등에 지배당하게 되어 있는 일체의 존재들을 관한다.


직접 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관함으로써 연민을 일으키는 공부가 높은 수준에 도달한 후에 우리는 다시 부도덕한 수단을 통해 얻은 행복을 누리고 있는 내 눈앞의 사람들 쪽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행복을 누리는 듯 보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틀림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내면적 고민의 흔적을 표출하지는 않지만 결국 악행의 쓰디쓴 과보를 받게 될 것이고 그 과보가 심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은 자명하다. 결국 이렇게 해서 이 관법의 적용범위는 일체 살아있는 유정물에까지 확대된다. 다시 말해 일체 유정이 자신의 탐?진?치에 떠밀려 생과 사를 돌고 돌면서 윤회의 보편적인 (苦)에 매여 있는 모습을 관하게 된다. 전연 낯선 존재들에 대해 연민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을 경우에는 ‘시작이 없는 저 윤회의 길고 긴 과정에서 한 때 나의 부모 형제 자식이 아니었던 사람을 찾기는 어려우리라’는 부처님 말씀은 큰 도움이 된다.


요약하면 버림, 선의, 무해의 세 가지 올바른 의도는 욕망, 악의, 해악의 세 가지 그릇된 의도를 저지한다. 이런 올바른 생각들이 일어나도록 성찰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성찰법은 단순히 이론적 섭렵의 대상이 아니라 계발되어야 할 실다운 방법으로 가르쳐져 왔다. 버림의 의도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세속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고와 밀착되어 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선의의 의도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가 얼마나 행복을 갈구하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무해의 의도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가 얼마나 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지를 숙고해야 한다. 불선한 생각은 마음속에 박혀 있는 썩은 나무못과 같고 선한 생각은 이것을 대체하기에 알맞은 새 못과 같다. 실제적 성찰행위는 새 못을 대고 두들겨 박아 낡은 못을 쳐낼 때의 망치치기에 해당한다. 새 못을 박는 일이 곧 수행이며 성공을 거두기까지 이러한 수행을 꾸준히 거듭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성공을 보증하셨다. 무엇이든 우리가 자주 마음을 쓰면 그것이 마음의 성향으로 자리 잡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음란하거나 적의가 담겼거나 위해를 가하려는 생각을 자주 품으면 욕망, 악의, 해악이 우리 마음의 성향으로 자리 잡고, 그 반대쪽으로 마음을 자주 쓰면 버림, 선의, 무해가 우리 마음의 성향으로 자리 잡는다. (《중부》19경) 여기서 우리가 선택하는 방향은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 와서 인생의 매 순간순간에 일으키게 되는 의도에 반영된다.

Ⅳ 바른 말[正語 samm? v?c?], 바른 행위[正業, samm? kammanta], 바른 생계[正命 samm? ?jiva]

팔정도의 다음 세 항목인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는 팔정도를 계?정?혜로 나눌 때 그 첫 번째인 계온(戒蘊 s?lakkhandha)에 해당한다. 따라서 계로서의 공통된 성격을 살리는 의미에서 이들을 한꺼번에 다루고자 한다. 비록 이 원칙들이 비도덕적 행위를 억제하고 선행을 증진하는 것이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윤리적이기보다는 수행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항목들은 단순히 행위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순화를 돕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다운 삶의 척도인 윤리는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특유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팔정도라는 특수한 맥락에서의 윤리적 원칙은 고로부터의 해탈이라는 팔정도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에 비추어 보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수련[戒]이 팔정도에 어울리는 한 부분이 되기 위해서는 이 수련이 어디까지나 팔정도의 처음 두 항목인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의 바탕 위에서 다루어져야 하고, 뿐만 아니라 집중[定]과 지혜[慧] 수련으로 나아가는 길잡이 역할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도덕적 수행이 계?정?혜 삼학 중에서 맨 처음 것에 해당한다고 해서 이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계행은 다른 수행의 성공을 위해서 필수적이며 모든 팔정도 수행의 기반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리 사소한 잘못이라도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위험을 보라” (《우다나》4장 1)고 하시면서 계율을 철저히 지킬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셨다. 한 수행승이 부처님을 찾아가서 ‘수행에 대한 말씀을 간략하게 해주십사’고 청하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먼저 선법(善法)의 시작인 청정한 계행과 바른 견해를 확립하라. 너의 계행이 청정해지고 견해가 곧아지면 다음으로 사념처를 닦아야 할 것이다. (《상응부》47상응 3경)


우리가 ‘계’라고 번역하는 빠알리어 ‘실라(s?la)’는 경전에서 중첩되는 여러 의미들로 나오고 있는데 모두 바른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어떤 맥락에서는 이 말이 도덕적 원칙에 부합되는 행위를, 또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 원칙 그 자체를, 또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 원칙을 준수한 결과로 생기게 되는 성격의 덕스러운 자질을 의미한다. 교훈이나 원칙이라는 의미에서의 ‘실라[戒]’는 윤리적 수련의 형식적 측면을 나타내고, 덕성으로서의 ‘실라’는 활기찬 정신을, 바른 행위로서의 ‘실라’는 현실상황으로 드러나는 덕성을 의미한다.

‘실라[戒]’는 ‘불선한 신체적, 언어적 행위를 그만 두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런 정의는 외형적 행동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피상적인 것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그러나 다른 설명들도 있어서 이런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뿐 아니라 이 말이 처음 언뜻 이해한 것보다 더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예컨대, 아비담마에서는 ‘실라[戒]’를 심적 요소의 세 가지 절제(viratiyo) ―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와 대등한 것으로 보는데 이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면 도덕 지침인 계의 준수를 통해 실제로 계발되는 것이 결국은 마음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실라’의 수련은 사회적으로 해로운 행위를 금하는 ‘공적인’ 이익도 가져오지만 정신적 순화라는 개인적 이익도 수반하여 번뇌가 우리에게 이런저런 행동노선을 따르라고 명령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영어의 ‘morality(도덕)’이라는 말과 그 파생어들은 불교의 ‘실라’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있는, 의무와 구속의 뜻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함축적인 의미는 아마 신학적 배경을 갖고 있는 서양 윤리학 특유의 산물일 것이다. 불교는 비신학적 구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불교 윤리는 ‘복종’이 아닌 ‘조화’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 주석서들에는 ‘실라’를 ‘사마다나(sam?dh?na)’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말은 ‘조화’ 또는 ‘동위화(同位化)’를 의미한다.


계를 준수하면 사회적 차원, 심리적 차원, 업(業)의 차원, 선정의 차원에서 조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계의 원칙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조화로운 관계를 맺도록 도와준다. 제각각 여러 갈래로 서로 다른 개인적 이해와 목표를 가지고 사회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군중을 하나의 응집력 있는 사회질서 속으로 융화시키며, 개인들 간의 갈등도 비록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감소시키는 효과는 있다. 심리적 차원에서는, 계의 준수가 마음에 조화를 가져다주고, 도덕적 비행으로 인한 죄의식과 자책 때문에 생기는 심적 갈등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업의 차원에서 계의 준수는 업의 보편적 법칙과 조화를 이루게 하고 장차 윤회과정에서 좋은 결과를 보장해준다. 마지막으로 선정의 차원에서 보면, 계는 마음의 예비적 순화가 이루어지도록 돕는다. 이렇게 이루어진 마음의 순화는 더욱 심도 있게, 더욱 철저하게 적정(寂靜)과 통찰력을 체계적으로 계발해 나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戒) 수련의 항목들이 간단히 정의될 때에는 대개 무엇을 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적 언사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계에는 잘못을 삼가는 것 이상의 뜻이 있다. 계에 포함된 각 원칙들은, 곧 보겠지만, 실제로 두 가지 측면을 갖추고 있는데 이 두 가지가 모두 수행 전반에 필수적인 것이다. 첫째는 불선을 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을 열심히 행하는 것이다. 앞의 것은 ‘피함(v?ritta)’이라 하고 뒤의 것은 ‘실행(c?ritta)’이라 한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수련의 시작 단계에서는 피하는 쪽을 강조하신다. 불선을 삼가는 것으로 충분해서가 아니라 수행의 단계를 순서대로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이다.

《법구경》의 유명한 게송에서 “모든 악행을 멀리 하는 것, 선을 계발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183 게)”라고 하여 이들 단계가 시간적으로 보다는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순서에 따라 적시되어 있다. 다른 두 가지 단계, 즉 선을 계발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단계도 물론 충분한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 여러 단계를 밟아 계의 수련에 확실하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선을 피하겠다는 결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결의가 없이 선한 자질부터 계발하려고 서둘다가는 결과적으로 그 자질은 뒤틀리고 위축되고 말 것이다.


계의 수련은 밖으로 행동이 드러나는 두 가지 주요 통로인 말과 몸뿐 아니라 생계를 영위하는 방식이라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관심 영역을 관장한다. 그래서 이 수련에는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의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이제 팔정도를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순서에 따라 이들을 하나하나 검토해 나가기로 하자.



바른 말[正語 samm? v?c?]


부처님은 바른 말을, 거짓말[妄語] 멀리하기, 말전주[兩舌] 멀리하기, 거친 말[惡口] 멀리하기, 쓸데없는 말[綺語] 멀리하기의 네 가지로 나누셨다. 말이 미치는 효과는 신체적 행위의 효과처럼 당장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중요성과 잠재력을 가벼이 보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말이나 그 방계격인 글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사실 동물과 같이 언어 이전 단계의 수준을 살고 있는 존재의 경우에는 몸짓이 중요할 수밖에 없겠지만 언어로 의사를 소통하는 인간에게는 말이 훨씬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말인생을 망칠 수도 있고 적을 만들 수도 있고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한편, 지혜를 줄 수도 있고 분열을 화해시킬 수도 있고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특히 현대사회에 와서는 의사소통의 수단, 속도, 범위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 확대됨에 따라 말의 긍정, 부정 양면의 효과가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말이든 글이든 언어로 의사 표시를 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특성이다. 이 점에서 보더라도 이 독특한 능력을 인간의 장점을 더 높이는 쪽으로 잘 사용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귀한 능력이 인성후퇴의 징표로 쓰이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이다.


(1) 거짓말 멀리하기(mus?v?d? verama??)


이 문[佛門]에서 수행자는 거짓된 말을 피하고 이를 멀리한다. 그는 진실을 말하고 진실에 헌신하며 믿을 수 있고 신뢰할 만하며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공식 회합에 참석해서든 비공식 모임에서든 또는 사사로운 친척들의 모임에서든 공공적인 사교석상에서든 또는 조정에 나가서든 어떤 처지에서도 아는 바를 얘기해 달라거나 증언해 주도록 요청받으면 그는 대답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또 아는 경우에는 “나는 안다”라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면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고, 보았으면 “나는 보았다”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도, 또 어떤 종류의 이익을 위해서도 결코 고의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27)


부처님의 이 말씀은 계율의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 두 면을 다 드러내고 있다. 거짓말 하지 않는 것 소극적 측면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적극적 측면이다. 이 계율을 어기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요소는 남을 속이려는 의도이다.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경우는 속이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계율 위반이 되지 않는다. 또 모든 거짓말에는 속이려는 의도가 들어있지만, 그 속임수가 취하는 외형은 속임의 동기에 따라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탐욕이 주된 동기일 경우의 거짓말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위한 물질적 부, 지위, 존경, 칭찬 등등 무언가 일신상의 이익을 얻어내려는 거짓말로 되어버린다. 미움이 주된 동기일 경우의 거짓말은 악의적인 속임수, 다시 말해 남을 해치거나 손상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속임수의 형태를 띠게 된다. 비합리적인 거짓말, 강박관념에서 나오는 거짓말, 재미있는 과장, 농담으로 하는 거짓말 등등 미혹이 주된 동기일 경우, 그 결과는 좀 덜 유해한 형태의 거짓말이 될 수 있다.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이토록 나쁜 것으로 말씀하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거짓말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응집력을 해친다. 사람들이 같이 어울려 살려면 상호신뢰의 분위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그런 분위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남들이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신뢰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불신을 조장할 경우, 거짓말이 만연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사회적 결속은 해이해지고 무너져 내려 사회생활은 혼돈상태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회구성원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개인적 면에서도 거짓말이 초래하는 결과는 이에 못지않게 파괴적이다. 또 거짓말은 새끼치기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일단 한 번 거짓말을 해버리면 그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도록, 그래서 자신의 신용도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앞뒤가 맞게 부득이 또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아귀를 맞추기 위해 거짓말에 거짓말이 가지를 쳐서 뻗어나가게 된다. 그 결과 그 사람은 좀체 헤어날 수 없는 거짓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이런 양태를 보면 거짓말은, 자아라는 주관적 환상이 빚어지는 과정, 즉 유신견(有身見 sakk?yadi??hi)이라는 착각을 둘러싼 전 과정을 축소시켜 놓은 전형적 예인 셈이다. 두 경우 모두 자신만만한 거짓말 창조자가 자신의 속임수에 휘말려들어 결국은 속임수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부처님께서, 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신의 어린 아들 라훌라에게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해주신 것도 아마 거짓말의 이런 측면을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라훌라에게로 오셔서 물이 약간 담긴 대야를 가리키며 물으셨다.

“라훌라야, 이 대야에 조금 남은 물이 보이느냐?”

“예, 보입니다.”라고 라훌라는 대답했다.

“라훌라야, 고의로 거짓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문의 정신적 성취도 이와 같이 보잘 것 없느니라.”

이어서 부처님은 그 물을 쏟아 버리고 대야를 내려놓으며 말씀하셨다.

“라훌라야, 물이 버려진 것이 보이느냐?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자는 자신이 쌓은 정신적 성취를 이처럼 쏟아 내버리고 있는 것이니라.”

부처님은 다시 물으셨다.

“너는 이 대야가 이제 비어 있는 게 보이느냐? 거짓말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의 정신적 성취도 이와 똑같이 비어 있느니라.”

부처님께서는 그 대야를 뒤집어 놓으시고 말씀하셨다.

“라훌라야, 이 대야가 뒤집어져 있는 것이 보이느냐? 이와 똑같이 고의로 거짓말하는 자는 자신의 정신적 성취를 뒤집어놓기 때문에 향상을 할 수 없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농담으로라도 고의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며 부처님은 말씀을 맺으셨다.28)


깨달음을 추구하며 수없는 생에 걸쳐 기나긴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보살[깨닫기 이전의 부처님]이 여러 계율을  어기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진실을 말하겠다는 서원만은 결코 어기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결코 흘려듣고 넘길 범상한 말이 아니다. 진실에 전념하는 일은 윤리[戒]의 영역은 물론 정신적 순화[定]의 영역마저 넘어서, 우리를 지혜와 진리의 영역에까지 나아가도록 만드는 중차대한 의미를 띤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진실된 말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영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개인적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지혜가 차지하는 비중과 맞먹는다. 진실된 말과 지혜, 이 두 가지는 각각 참된 것을 지키려는 동일한 노력이 내적?외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지혜는 진실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진실(sacca)은 말로 된 명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 그 자체이다. 진실을 실현하려면 혼신을 기울여 우리 전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사물, 즉 사실[실상]과 부합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이와 의사소통을 할 때에도 진실만을 말함으로써 사실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게끔 되어야 한다. 진실된 말은 우리 내면의 세계와 현상의 참 성질 사이에 일치성을 확립시켜서, 지혜가 생겨나도록, 그래서 현상의 참 성질을 통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온 마음을 다해 진실된 말을 지켜내는 것은 윤리적 원칙의 범주를 훨씬 넘어, 우리가 환상이 아닌 실상에, 욕구가 빚어낸 공상이 아니라 지혜로 파악한 진실에 발을 딛고 서게 되는 일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2) 말전주 멀리하기(pisu??ya v?c?ya verama??)


이 문에서 수행자는 말전주를 피하고 이를 떠난다. 여기서 들은 말을 저리 가서 옮기거나 저기서 들은 말을 이리로 옮김으로써 불화를 조성하지 않는다. 서로 틀어진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사람들의 화합을 북돋운다. 화합은 그를 기껍게 해주고, 그는 화합을 기뻐하고 즐긴다. 이와 같이 그가 말로써 널리 퍼뜨리는 것은 바로 화합이다.29)


말전주란 의도적으로 적개심과 분열을 조장하는 말, 개인이나 집단을 남들과 소원해지도록 만드는 말을 일컫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동기는 보통 진심(瞋心)인데, 경쟁자의 성공이나 덕성을 미워하는 용심, 남을 헐뜯고 모욕을 가하려는 의도 등이 그 뒤에 숨어 있다. 여기에 다른 동기가 끼어드는 수도 있다. 남들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잔인한 의도, 환심을 사려는 비열한 욕구, 친구들의 틀어진 모습을 보는 것을 재미로 삼는 뒤틀린 마음씨 등이다.


말전주야말로 가장 심각한 도덕적 일탈행위이다. 그 뿌리가 되는 증오만 해도 이미 충분히 무거운 불선업이다. 그런데 이 행동은 미리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전계획이 갖는 무게까지 첨가되어 그만큼 부정적인 힘은 더 강해진다. 더구나 이렇게 이간질하는 말의 내용이 거짓일 경우, 거짓말과 말전주 이 두 가지 잘못이 결합해서 매우 강력한 불선업을 낳는다. 경전에는 무고한 사람을 중상한 탓으로 바로 악도에 떨어지게 되는 사례들이 여러 군데 실려 있다.


말전주에 반대되는 말은 부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친목과 화합을 증진시키는 말이다. 이런 말은 자애와 연민, 즉 자비의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따라서 이런 말은 남들의 신뢰와 애정을 사게 된다. 자비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더라도 그것을 악용해서 자기를 해코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기 때문이다. 친목과 화합을 증진시키는 말은 금생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서도 그 선업의 결과로 남들의 말전주에 놀아나지 않는 충실한 벗들을 얻게 된다는 이점30)있다.


(3) 거친 말 멀리하기(pharus?ya v?c?ya verama??)


이 문에서 수행자는 거친 말을 피하고 이를 떠난다. 그는 점잖고 듣는 이를 편하게 하며 애정이 깃든 말, 가슴에 가 닿을만하며,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말을 한다.31)


거친 말은 화가 나서 내뱉는 말로서 듣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는데 그 중 세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는 ‘독설’이다. 즉, 화가 나서 신랄한 말을 하거나 욕하거나 꾸짖는 형태의 말이다. 둘째는 ‘모욕’이다. 상대방에게 인신공격성 어투로 자존심에 상처를 줌으로써 해를 입히는 말이다. 셋째는 ‘빈정거림’이다. 즉,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 하지만 그 억양이나 말투로 보아 빈정대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남으로써 남을 괴롭히는 형태의 말이다.

 

거친 말의 주된 뿌리는 화냄의 형태로 표출되는 진심(瞋心)이다. 거친 말은 깊은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저질러지기 때문에 비방의 경우보다 죄가 덜 무겁고 일반적으로 그 업보도 덜하다. 그러나 거친 말은 남뿐 아니라 나에게도, 지금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불선한 행위이기에 자제해야 한다. 참는 것이 최선의 대응책이다. 남들의 비난과 비판을 참고 듣기, 그들의 모자람을 이해하기, 나와 다른 견해를 존중하기, 앙갚음하겠다는 생각 없이 욕설을 참아내기 등의 마음가짐을 익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참아내라고 하셨다.


비구들이여, 강도나 살인자가 비록 팔과 다리나 뼈마디를 톱으로 자른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화를 내고 만다면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지 않는 것이 된다.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흐트러지지 않고 여일할 것이다.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운 채, 어떤 숨어있는 원한도 없는 채로, 미움과 증오에서 벗어난 넓고 깊고 한량없는 사랑으로 넘쳐나서 저 사람을 감화시키고 말리라.”32)


(4) 쓸데없는 말 멀리하기(samphappal?p? verama??)


이 문에서 수행자는 쓸데없는 말을 피하고 이를 떠난다. 그는 때에 맞게 말하고, 사실에 부합되게 말하고, 유용한 말을 하고, 법과 계율을 말한다. 적절한 때에, 절도를 잃는 일 없이 온유하면서도 사리에 꼭 맞게 하는 그의 말은 보석과도 같다.33)


쓸데없는 말은 목적도 깊이도 없는 무의미한 말이다. 이런 말은 아무 가치도 없는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자신과 남들의 마음에 번뇌만 일으킨다. 부처님은 쓸데없는 말을 억제해야 하며, 말은 가능한 한 아주 중요한 일에만 한정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방금 인용한 문구에서처럼, 수행승의 경우 말을 가려서 해야 하고 주로 법에 관한 말만 해야 한다. 재가자는 출가자와는 다를 수밖에 없어 친구나 가족끼리의 정 깊은 사사로운 이야기, 아는 사이끼리의 예의바른 이야기, 생업과 관련된 이야기 등을 해야 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화를 할 경우에도, 무언가 달콤하고 맛난 먹을거리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헤매고 있는 들뜬 마음에게 오염될 기회만 실컷 제공하고 마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잘 챙기고 있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쓸데없는 말을 멀리하라는 가르침은 쓸데없는 말을 스스로 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부처님과 옛 주석가들의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이 시대의 특이한 발전양상을 보고 있으면 이 가르침에 또 하나의 해석을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즉,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속된 잡지, 영화 등 현대기술의 산물인 새로운 통신매체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저 쓸데없는 수다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지 말라는 해석이다.34) 이 놀라운 매체들이 쓸모없는 정보와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오락거리를 퍼부어대는 동안 사람의 마음은 갈수록 수동적이 되고, 공허하고 황량해진다. 우리가 순진하게도 ‘진보’의 산물로 받아들이는 이 모든 문명의 이기들은 우리심미적, 정신적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수행이라는 한층 더 높은 삶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게 만든다. 해탈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열성적 구도자는 어떤 언어적 환경에 귀기울여야 할지를 판별해야 한다. 요컨대 이런 종류의 오락물이나 불필요한 정보 역시 쓸데없는 말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를 피하려는 노력은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다.



바른 행위[定業 samm? kammanta]


바른 행위는 불선한 행위가 몸을 그 자연스러운 표현수단으로 삼아 일어나는 것을 삼간다는 의미이다. 팔정도의 ‘바른 행위’라는 항목의 핵심은 물론 ‘자제’라는 심적 요소이다. 그러나 이 자제가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위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른 행위’라 부르는 것이다. 부처님은 바른 행위를 구성하는 세 가지 행위, 즉 살생 멀리하기, 주어지지 않은 것 취하기를 멀리하기, 부정한 성행위 멀리하기를 말씀하셨다. 이 세 가지를 순서대로 간략하게 살펴보자.


(1) 살생 멀리하기(p???tip?t? verama??)


이 문에서 수행자는 살생을 피하고 이를 멀리한다. 몽둥이도 칼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이 도덕에서 벗어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들에 대해서는 동정심으로 가득 차서 모든 유정들이 편안하기를 염원한다.35)


‘살생을 멀리한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하지 않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 적용 범위는 훨씬 더 넓다. 이 계율은 그 어떤 유정물(有情物)도 살상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유정물(p???, satta)’이란 마음 또는 의식을 지닌 생물로서 실제로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곤충을 의미한다. 식물은 어느 정도의 감수성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유정물 여부를 규정짓는 기준인, 의식을 제대로 갖춘다는 기본 속성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생명을 해치는 일’은 의도적인 살상, 즉 의식을 지니고 있는 존재의 생명을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다. 살생을 멀리한다는 원칙은 모든 존재는 살고 싶어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이 계율의 위반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인은,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일으키는 살생 의욕이다. 자살도 일반적으로 불살생 계율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생명을 앗으려는 의도가 없는 우발적 살상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계율은 일차적인 행위이차적인 행위 모두에 적용된다. 일차적인 행위는 실제로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고, 이차적인 행위는 죽이지는 않더라도 다른 존재를 의도적으로 해치고 괴롭히는 행위다.


해치지 말라는 것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은 매우 간결하고 직설적인 데 비해서 후대 주석가들은 이 계율 세밀분석하고 있다. 태국의 한 박학한 승왕(sa?ghar?ja) 이전의 방대한 자료를 매우 꼼꼼히 논문으로 정리했으며36)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살생은 도덕적 무게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눌 수 있고 거기에 따르는 결과로 죄값이 제각기 달라진다. 도덕적 무게를 결정하는 세 가지 주요 변수는 대상, 동기, 그리고 살생에 쏟은 노력이다. 대상과 관련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동물을 죽이는 것은 그 심각성이 다른데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무거운 악업을 짓는 것이다. 사람이 동물에 비해 훨씬 더 발달된 도덕적 의식과 더 큰 정신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살해당한 사람의 자질에 따라서, 또 살해자와의 관계에 따라서 업의 무게달라진다. 따라서 부모나 스승과 같이 은혜를 베푼 사람이나 정신적으로 수승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특별히 무거운 업을 짓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살생의 동기 역시 도덕적 무게에 영향을 미친다. 살생행위는 욕심, 증오, 미망 등에 의해서 추동다. 이 셋 중에서 미움 때문에 죽이는 것이 가장 엄중한 것이 되며, 사전계획의 정도에 따라 그 무게도 비례해서 증대된다. 마지막으로 그 행위에 기울인 노력의 강도 역시 중요하다. 어느 정도로 그 마음의 때가 강한 힘과 강제력을 가졌느냐에 정비례하여 업의 불선한 정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살생을 피하기 위한 적극적 대처방법은 부처님이 지적하셨듯이 다른 존재에 대해 자비심을 키우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는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피할 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안녕을 염려하는 연민심으로 충만한 삶을 산다. 해치지 않도록 노력하고 남들의 안녕을 위해 마음 쓰는 것은 이미 팔정도의 두 번째 항목인 바른 의도[正思]를 선의와 무해의 형태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 된다.


(2) 주어지지 않은 것 취하기를 멀리하기(adinn?d?n? verama??)


이 문에서 수행자는 정당하게 얻은 것이 아닌 것은 가지기를 피하고 이를 멀리한다. 마을이나 숲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훔치려는 의도로 가져가지 않는다.37)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정당한 소유물을 훔치려는 의도에서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소유권이 주장되지 않은 돌이나 나무, 심지어 땅에서 캐낸 보석까지도 소유주가 없는 경우에는 비록 주어지지 않은 것이라 해도 이를 취하는 것이 계율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당연히 주어야 할 것인데도 이를 주지 않고 버티는 것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계율을 어긴 것으로 간주된다.


주석서들은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행위가 범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사례 언급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흔한 것을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절도 : 남에게 속한 물건을 가택 침입, 소매치기 등과 같은 방법으로 주인 몰래 취하는 것.

2) 강도 : 남에게 속한 물건을 강제로 또는 협박을 가해서 빼앗는 것.

3) 날치기 : 남에게 속한 물건을 반항할 틈 없이 갑자기 낚아채는 것.

4) 사취(詐取) :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자기 것이라 거짓으로 주장하여 취하는 것.

5) 속임수 : 엉터리 저울이나 자로 고객을 속이는 것.38)


이런 행위 훔친 물건의 가치, 피해자의 자질, 도둑의 심리상태 등 세 가지에 의해 도덕적 무게가 결정된다. 첫째로, 도덕적 무게는 훔친 물건의 가치에 비례한다. 둘째로, 도덕적 무게는 피해자의 도덕적 품격에 따라 달라진다. 셋째로, 도덕적 무게는 가해자의 동기에 따라 달라진다. 도둑행위는 탐심이나 미움이 그 동기가 될 수 있는데 대체로 탐심이 가장 흔한 동기이다. 미움이 그 동기가 되는 것은 물건이 탐이 나서라기보다는 소유주를 해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할 경우다. 이 두 가지 중, 미움 때문에 도둑질하는 것이 단순한 탐심에 의한 것보다 더 무거운 악업을 짓는 것이 된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기 위한 적극적 대처방법은 ‘정직하기’로서, 여기에는 타인의 소유권과 향유권을 존중해주는 것이 포함된다. 여기에 관련되는 또 다른 덕목은 지족(知足)으로,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부를 증식시키고자 하지 않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이다. 훔치고자 하는 마음에 대처하는 가장 빼어난 덕목은 보시행인 바, 자기의 부와 소유물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다.


(3) 부정한 성행위 멀리하기(k?mesu micch?c?r? verama??)


이 문에서 수행자는 성적 불륜행위를 피하고 이를 멀리한다. 부모 형제, 친척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들과 성관계를 갖지 않고 결혼한 사람, 여자 죄수, 그리고 남과 약혼한 여자들과도 관계를 갖지 않는다.39)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계율이 지향하는 목적은 결혼관계를 외부적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고 결혼 당사자들 간의 신의와 정절을 증진시키는 데 있다. 정신적 향상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계율은 성적 욕구가 커지는 성향에 제동을 걸고, 이욕(離慾)의 방향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 마침내 출가수행자가 독신생활[梵行]을 준수하는 데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나 재가불자의 경우 이 계율은 부적절한 대상과의 성적 관계를 금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완전한 성관계를 갖는 경우 이 계율을 전적으로 어기는 것이며, 완전한 성관계에 이르지 않는 갖가지 성적 행위도 어느 정도는 이 계율을 어기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계율에서는 부적절한 대상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주로 제기될 수 있다. 부처님 말씀은 남자에게 부적절한 대상을 규정하고 있지만 이후 논서들에서는 이 문제를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의 입장에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40)


남자에게 부적절한 상대는 다음 세 부류의 여자들이다.

1. 다른 남자와 이미 결혼한 여자 : 여기에는 다른 남자와 이미 결혼한 여자 이외에 한 남자의 합법적인 처가 아니면서도 그와 함께 살거나 그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기타 그의 짝으로 간주되어 일반적으로 그와 같이 사는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는 여자도 포함한다. 이런 여자들은 모두 그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는 부적절한 대상이다. 이 범주에는 다른 남자와 약혼한 여자도 포함된다. 그러나 과부나 이혼녀는 별도의 사유가 없는 한 부적절한 관계로 간주되지 않는다.

2. 아직 보호받고 있는 여자 : 부모, 친척, 기타 합법적 보호자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소녀나 여인들을 말한다. 이 규정은 보호자의 뜻을 어기고 애인과 함께 도망간 여자나 비밀결혼을 한 여자는 제외한다. (이 조항은 보호자의 허락 없는 가출이나 비밀결혼을 막기 위한 것이다.)

3. 관습에 의해 금지된 여자 : 사회적 전통이 짝으로 금하는 근친, 독신을 맹세한 비구니나 그 외의 여자, 그리고 국법에 의해 상대자로 삼지 못하도록 금하는 여자들이 포함된다.


여자에게는 다음 두 부류의 남자들이 부적절한 상대이다.

1. 결혼한 여자에게는 남편이 아닌 모든 남자들은 부적절한 상대이다. 따라서 결혼한 여자가 남편에게 한 정절 서약을 깨는 것은 곧 이 계율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나 과부나 이혼한 여자는 다시 결혼할 수 있다.

2. 가까운 친척이나 독신을 맹세한 남자 등, 관습이 금하는 남자는 어떤 여자에게도 부적절한 상대다.


이 외에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적 결합은 계율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위반행위는 가해자에게만 해당되고 강제로 당한 쪽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성적 불륜이 해서는 안 될 사항이라면 재가자가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덕목은 결혼의 정절을 지키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성실해야 하고 헌신적이어야 하며 부부관계로 만족해야 하고 다른 상대를 넘봄으로써 결혼관계의 파탄을 초래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성적 관계를 반드시 결혼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적 관습 여하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이미 말한 대로 이 규범의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을 해치는 성적 관계를 예방하려는 것이다. 독립적 개체로서의 성인 남녀비록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 끼치지 않는다면 계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구족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 사미와 사미니, 그리고 하루 밤 하루 낮 동안 팔계를 받아 지키는 재가남녀는 금욕생활을 지켜야 한다. 이들은 성적 불륜을 피해야 함은 물론이고 적어도 그들이 서원을 세운 기간 동안에는 성과 관련된 일체 행위는 금해야 한다. 가장 높은 경지의 성스러운 생활은 생각, 말, 행동에 있어서 완전한 청정성을 지향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성적 욕구를 잠재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바른 생계[正命 samm? ?j?va]


바른 생계라는 항목은 우리가 생계를 올바른 방법으로 꾸려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부처님은 재가불자들이 부를 축적할 때 다음과 같은 기준들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재물은 반드시 합법적으로 획득해야 하며 불법적으로 획득해서는 안 되고, 평화적으로 벌어야 하며 강제나 폭력을 써서는 안 되고, 정직하게 벌어야 하며 사기나 속임수로 얻어서는 안 되고,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해나 고통을 끼치지 않는 방법으로만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해를 입히는 다음 다섯 가지 생계수단을 구체적으로 들고 이를 피하라고 말씀하신다.41)


1) 무기 거래

2) 생명체의 거래(도살을 위해 동물을 사육하는 것. 노예        매매, 매춘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3) 육류 생산 및 도살업

4) 독약 거래

5) 술이나 마약 거래      (《증지부》5법집 177경)


또 부정직하게 부를 획득하는, 사기, 배신, 점술, 속임수, 고리대금업 등을 잘못된 생계수단으로 열거하셨다. (《중부》117경)

바른 말과 바른 행위를 어기게 만드는 직업이라면 무엇이건 다 잘못된 생계수단임이 분명하다. 술?마약의 거래 같은 직업은 그 자체가 이런 계율을 어기게 만들지는 않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므로 역시 나쁜 것이 된다.


앞서 인용한 태국 승왕의 논문은 바른 생계를 논하면서 편의상 행위와 관련하여 올바른 것, 사람과 관련하여 올바른 것, 그리고 대상물과 관련하여 올바른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42) ‘행위와 관련하여 올바른 것’은 일꾼들이 근무시간을 허송하거나, 근무시간을 늘여서 보고하거나, 회사의 물건들을 제 호주머니에 넣는 따위의 짓을 하지 않고 부지런히 양심적으로 자기가 맡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과 관련하여 올바른 것’이라 함은 고용주, 고용인, 동료, 고객들에게 응분의 존경과 배려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용주가 고용인들에게 일을 맡길 때 그 사람의 역량에 맞게 맡겨야 하고, 적절한 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승진을 해야 할 때 승진시켜주어야 하고, 때때로 휴가와 상여금을 주어야 한다. 동료끼리는 서로 경쟁하는 대신 협동해야 하며, 상인들은 고객과의 거래에서 공정해야 한다. ‘대상물에 관련하여 올바른 것’이란 사업상 거래나 판매를 할 때 거래 품목을 정직하게 제공해야 함을 의미한다. 허위광고, 양이나 질에 대한 거짓표시, 부정직한 술책 등을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

V 바른 노력[正精進 samm? v?y?ma]


앞의 세 항목, 즉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로 청정한 행위가 확립되면 이는 도의 다음 단계, 즉 집중의 부분[定蘊 sam?dhikkhandha]으로 나아가 기반이 된다. 도덕적 자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접적인 정신훈련에 들어가는 수행의 이 단계는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의 세 항목으로 이루어진다. 이 단계를  집중의 부분[定蘊]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단계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지속적 집중력이기 때문이고, 집중 그 자체는 통찰지를 위한 토대로 꼭 필요하기 때문이며, 다시 그 통찰지는 해탈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로부터 나오는 꿰뚫어 보는 능력은 먼저 마음이 가다듬어지고 모아져야만 비로소 갖추어질있다. 바른 집중은 적절한 대상에 부동(不動)의 초점을 맞추어 마음을 통일함으로써 지혜를 이루는 데 필요불가결한 적정(寂靜)을 갖추도록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바른 집중의 항목은 바른 노력과 바른 마음챙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바른 노력은 이 과업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 주고, 바른 마음챙김은 주시할 때마다 확고한 초점들을 제공한다.


주석가들은 집중 부분[定蘊]의 이 세 항목들이 어떻게 서로 돕고 있는지를 간단한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세 소년이 공원에 놀러 간다. 공원을 거닐다가 그들은 어떤 나무 꼭대기에 핀 꽃을 발견하고 그 꽃을 따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그 꽃은 그 중 가장 키가 큰 소년도 딸 수 없는 높이에 있다. 그때 한 친구가 몸을 굽히며 자기 등에 올라서라고 한다. 키 큰 소년이 올라서지만 등에서 떨어질까 두려워 꽃을 향해 손을 마음껏 뻗지 못한다. 이에 세 번째 소년이 자기 어깨에 기대라고 한다. 첫 번째 소년은 두 번째 소년의 등에 올라선 채 세 번째 소년의 어깨에 기대고는 손을 뻗어 마침내 꽃을 따 모은다.43)


이 비유에서 꽃을 따는 키 큰 소년은 마음을 통일시키는 기능을 하는 집중을 나타낸다. 그러나 마음을 집중하고 통일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다. 등을 대준 소년의 경우처럼 바른 노력이 제공하는 에너지가 그 역할을 한다. 집중은 또 어깨를 대준 소년의 경우처럼 마음챙김이 제공하는 안정시켜주는 알아차림을 필요로 한다. 바른 집중이 이런 도움을 받게 되면, 마침내 바른 노력에 의해 힘이 강화되고 바른 마음챙김에 의해 균형이 잡혀서 흐트러진 생각의 가닥들을 끌어 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마음을 확고하게 목표에다 고정시킬 수 있게 된다.


바른 노력의 이면을 이루는 심적 요소인 에너지(viriya) 건전한 형태로도 불건전한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같은 요소이지만 한편으로는 욕망, 공격, 폭력, 야심 등에, 다른 한편으로는 보시, 지계, 자비, 집중, 이해에 연료를 공급한다. 바른 노력에 포함되는 정근(正勤 padh?na)은 건전한 형태의 에너지이지만 좀 더 특수한 것으로서, 곧바로 고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하는 건전한 의식상태에 들어있는 정진력이다. 여기서 ‘곧바로 고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한다’는 수식구는 각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유익한 에너지가 도에 기여하려면 반드시 바른 이해와 바른 의도의 안내를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도의 여타 항목들과 유기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건전한 마음상태의 에너지가 대개 그렇듯이, 생사윤회 속에서 공덕 쌓기에 불과할 뿐,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이루어내지는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부지런함, 분발, 해이해짐이 없는 불굴의 인내, 이 세 가지 노력의 필요성을 거듭거듭 역설하셨다. 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해탈은 각자 스스로 이루어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해탈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이는 것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 길을 직접 걸어가는 일인데 이 일에는 정진력이 필요하다. 이 정진력은 마음을 계발하는 데 소요되며 마음의 계발이야말로 전체 도의 핵심을 이룬다. 출발점은 미혹된 괴롭고 오염된 마음이고, 목표점은 청정하고 지혜로 밝아진 해탈한 마음이다. 오염된 마음을 해탈한 마음으로 바꾸는 것은 오로지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이다. 자기 계발이라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고, 또 남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부처님 당신과 그리고 큰 공부를 해낸 그분의 제자들이야말로 이 과업이 우리가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산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은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 같은 목표 지점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노력 없이는 안 된다. “나는 대장부다운 꿋꿋함과 활력과 분투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을 다 이루어내기 전에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44) 이런 결심으로 실천 공부를 지속하지 않는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다.


심적 과정의 성질상 바른 노력[正精進]은 다음 네 가지 ‘훌륭한 노력[四正勤]’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한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으       려는 노력,

(2) 이미 일어난 불선한 상태를 버리려는 노력,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상태를 일으키려는 노력,

(4) 이미 일어난 선한 상태를 유지하고 완전하게 만들려       는 노력.


불선한 상태(akusal? dhamm?)란 행동으로 표출되거나 아니면 마음속에 갇힌 채로 있는 번뇌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생각과 감정, 의도들이다. 선한 상태(kusal? dhamm?)란 번뇌로 오염되지 않은 마음상태들, 특히 해탈에 도움이 되는 마음상태들이다. 이 두 가지 마음상태에 대해서는 각각 두 가지씩 할 일이 있다. 불선한 상태의 경우, 아직 잠재해 있는 번뇌들이 표출되지 않도록 막고, 그리고 이미 활동을 벌이고 있는 번뇌는 쫓아내는 일이다. 선한 상태의 경우, 아직 계발되지 못한 해탈의 요소들을 일단 생겨나도록 하고, 그 다음에는 충분히 성숙한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그 요소들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바른 노력으로 분류한 이 네 가지 부분이 가장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명상을 통한 마음의 계발’이라는 텃밭을 효과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데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면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1)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한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이 문에서 제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하고 불선한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지를 일으킨다. 그래서 그는 노력하고 힘쓰고 마음을 분발하고 진력한다.45)


바른 노력[正精進]의 첫 번째 면은 번뇌로 때 묻은 마음상태, 즉 불선한 상태를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집중을 방해하는 측면에서 살필 때는 이 번뇌들을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ncan?vara??]46)라는 한 묶음으로 거론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섯 가지 장애란 감각적 욕구, 악의, 둔감과 졸림[昏沈], 들뜸과 걱정[掉悔], 의심이다.47) 이들은 해탈로 가는 길을 가로막기 때문에 ‘장애’라고 부른다. 이 장애가 자라나면 마음을 덮어서 향상에 필요불가결한 고요함[止 samatha]과 통찰[觀 vipassan?]이라는 두 수단을 일어날 수 없도록 막아버린다.

탐욕과 진에라는 불선의 뿌리들을 각기 대표하는 처음의 두 장애인 감각적 욕구와 악의는 그 다섯 중에서도 특히 강력해서 선정의 발전에 가장 강력한 장벽 노릇을 한다. 나머지 세 가지 장애는 앞의 것에 비해 독성은 덜하지만 역시 방해가 되는 것들로 치암의 곁가지들이며, 흔히 마음의 다른 때[垢]와 결합된 상태로 존재한다.


‘감각적 욕구’는 두 길로 해석된다. 좁은 의미에서, 마음에 드는 볼거리, 소리, 냄새, 맛, 접촉 등 ‘다섯 가닥의 감관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 감관적 쾌락, 부, 권력, 지위, 명예 등 애착이 붙는 모든 것, 즉 모든 형태의 갈애를 포괄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두 번째 장애인 악의’는 혐오감과 동의어이다. 악의는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 또는 대상물이나 상황을 막론하고 이들을 향한 불만, 미움, 노여움, 원망, 반감 등 모든 어두운 측면을 포함한다.

세 번째 장애인 ‘둔감과 졸림’은 정신적 불활발성이라는 공통된 특성에 의해 연결된 두 요소의 혼성체로서 그 중 하나는 마음의 굼뜸으로 나타나는 둔감(th?na)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까라짐, 마음의 무거움, 지나친 졸음 등에서 볼 수 있는 졸림[沈 middha]이다.

이와 정반대가 네 번째 장애인 ‘들뜸과 걱정’이다. 이는 불안정성을 공통적 특성으로 하는 두 요소의 혼성체이다. 들뜸(uddhacca)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빠르고 격하게 오가는 교란되고 흥분된 마음이고, 걱정(kukkucca)은 과거의 실수에 대한 후회와 이런 실수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에 대해 불안해하는 마음이다.

다섯 번째 장애인 ‘의심’은 고질적인 우유부단함, 즉 과단성의 결여를 의미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권장하신, 사물을 꿰뚫어 보는 비판적 지성과는 전혀 다른 의심하는 태도, 다시 말해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 부처님의 길에 대하여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해서 좀체 마음공부의 길로 뛰어들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뜻한다.


장애와 관련해서 해야 할 첫 번째 노력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장애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일이다. 이는 제어 또는 방호하려는 노력(sa?varappadh?na)이라고 한다. 장애를 제어하려는 노력은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나 수